《 전북 완주군의 농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막둥이인 내가 태어난 지 1년 뒤인 1951년 돌아가셨다. 홀로 3형제를 키우셨던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하셨다”고 늘 말씀하셨다. 1910년대에 고향 평안남도 성천과 만주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돼 12년간 옥살이를 하셨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
역사에서 잊혀진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 드리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난 뒤 조상의 뿌리를 확인하는 일이 일생의 목표가 됐다. 그때부터 1994년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리기 전까지 24년간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 헤맸다.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기록을 찾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정부기록보존소를 비롯해 일본 중국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동아일보 기사가 나기 1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기신 유언도 “아버지 기록을 꼭 찾아 달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연이 닿는 기자들을 찾아가 내 사연을 한 번만 써줄 수 없겠느냐고 읍소했다. 보통 기자들은 내 이야기를 듣다 말고는 “신빙성이 없어 기사 쓰기가 어렵겠다”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김일수 동아일보 당시 부국장은 달랐다.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근처 한식집에서 만난 김 부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사연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줬다. 기사를 실어주겠다는 확답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한 번만 더 만나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알았다. 기사를 실어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만나 보니 허튼소리 하는 사람 같진 않던데…. 젊은 사람이 고생 많이 했는데 소원풀이나 해주시오”라며 당시 사회부장에게 내 인터뷰를 실어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듣게 됐다. 1994년 광복절 다음 날, ‘항일운동 선친 기록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내 인터뷰 기사가 동아일보에 크게 실렸다.
기사가 나간 지 3일 뒤 집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신문 기사를 보고 연락했다. 보훈처로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차를 몰고 당시 여의도에 있던 보훈처로 향했다. 보훈처 자료관리과장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표지에 ‘박구진’이라는 아버지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내가 25년 동안 찾아 헤매던 아버지의 항일운동 기록을 찾았다는 걸 직감했다. 과장이 건네준 ‘가출옥관계서류’와 재판 판결문 복사본에는 아버지가 평남 성천군 금융조합을 습격해 일본 순사 3명을 사살하고 돈을 훔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약 12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류를 들고 차 안에 돌아와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눈물 먹은 목소리로 김 부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록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기사를 내면서도 사실 반신반의했다는 김 부국장도 내 일처럼 기뻐해줬다. 첫 기사가 나간 지 일주일 뒤인 8월 23일 선친의 항일 기록을 찾았다는 후속 보도가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다.
마침 그달 28일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전주의 이름 없는 야산에 묻힌 아버지의 묘소에 온 가족이 모였다. 집안 형님들은 “우리 막내가 아버지 기록 찾아 주려고 태어났나 보다”라고 하셨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아버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 다음 해 아버지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다.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다. 보훈연금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또 다른 인생 목표를 실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금을 모아 어렵게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창 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때 몇몇 사람은 “연금이 탐나서 그러느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지곤 했다. “연금 욕심은 전혀 없다.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나의 대답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연금이 나오기 시작한 후 형님들에겐 “원래 없었던 돈이니 계속 없었던 셈 치자”고 양해를 구했다.
11년간 모은 연금에 사업으로 번 돈을 보태 1억 원을 만들었다. 기부처를 고민하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준 동아일보와의 인연이 떠올라 동아꿈나무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기사가 나간 지 12년 만의 일이다. 나 자신이 어렸을 적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어려움을 잘 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그만두는 후손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2년 후에는 5000만 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나는 동아일보에 큰 도움을 받은 만큼 애정도 깊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도, 살벌했던 유신 독재 시절에도 독자들은 동아일보 덕분에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지령 3만 호를 계기로 동아일보가 더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고, 더욱 발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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