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82>진해 흑백다방의 알록달록 문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8일 03시 00분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흑백다방. 1955년 음악다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흑백다방. 1955년 음악다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군항제가 열리는 곳,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터리. 방사형 로터리를 둘러보면 옛 건물이 적잖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풍의 진해우체국(1912년), 중국풍의 육각 뾰족집 수양회관(1930년대),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화요릿집 원해루 그리고 길게 줄지어 선 적산가옥들. 그 옆으로 ‘흑백’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보인다. 커피숍 같기도 하고 연주회장 같기도 한 2층짜리 건물, ‘문화공간 흑백’이다. 입구 기둥엔 ‘창원시 근대건조물 4호’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이 건물은 1912년에 건축되었다. 1952년 여기에 ‘칼멘’이란 이름의 고전음악 다방이 문을 열었다. 1955년 서양화가 유택렬(1924∼1999)이 칼멘다방을 인수해 흑백다방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택렬은 1층 다방에서 고전음악 감상회를 열고, 2층에서는 창작 활동을 했다. 1960, 70년대 변변한 문화공간이 없던 시절, 흑백다방은 진해 지역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인근 통영에서 활동하던 화가 전혁림 이중섭, 시인 김춘수도 이곳에 드나들었다. 2008년 이후엔 유택렬의 딸이 연주회 전시 중심의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입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건물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온다. 벽이든 가구든 온통 빛바랜 색깔이다. 정면 중앙에 피아노가 있고 주변으로 오래된 음반과 악보들이 꽂혀 있다. 단정한 느낌의 풍금, 줄이 풀어진 바이올린, 말라붙은 물감 튜브, 손잡이가 너덜너덜해진 물감 박스, 살짝 먼지가 내려 앉은 뽀얀 석고상, 그을음이 남아 있는 등잔…. 창가의 오래된 소파에 앉으면 중원로터리 맞은편으로 진해우체국의 이국적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영화 ‘화차’를 촬영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매달 두 차례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외국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해군사관학교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들르는 사람도 있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들은 방명록에 ‘진해 문화의 등대’ ‘살아 있는 흑백’과 같은 소감을 남기기도 한다.

유택렬은 까치의 이미지를 차용해 흑백이란 이름을 지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의 이미지를 흑과 백으로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흑백다방은 군항제와 함께 진해의 자존심으로 자리 잡았다. 진해 사람들은 이곳을 흑백다방이 아니라 그냥 “흑백”이라 부른다. 흑백 63년의 역사는 진해의 문화예술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이광표 논설위원·문화유산학 박사
#군항제#진해 흑백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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