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하정민]앨리스와 이방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9일 03시 00분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나라를 통치하거나 딸을 단속할 수 있지만 둘을 동시에 할 순 없다.”

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워싱턴 사교계의 꽃’인 맏딸 앨리스 루스벨트(1884∼1980)에게 한 말이다. 그의 첫 아내는 출산 이틀 만에 숨졌다. 어머니 얼굴도 모르는 딸이 가여웠던 권력자 아버지는 딸을 금지옥엽으로 길렀다. 앨리스는 10대 시절부터 백악관에서 담배를 피우고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렸다. 미 언론은 빼어난 외모와 돌출 행동으로 유명한 그를 ‘앨리스 공주’ ‘드레스를 입은 야생동물’로 불렀다.

1905년 9월 19일 21세의 앨리스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대통령 아버지를 대신한 아시아 순방’ 목적을 내세웠지만 개인적 외유에 가까웠다. 당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노골적 야욕을 드러냈고 고종은 미국의 지지가 절실했다. 하지만 고종은 미국이 두 달 전 자신들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교환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음을 까맣게 몰랐다. 그래서 앨리스에게 황제 전용 열차와 가마를 내주고 지나는 길까지 미리 고쳐놓으며 극진히 대접했다.

앨리스는 10박 11일의 방한 기간 내내 관광에 바빴다. 압권은 동대문구 홍릉을 찾았을 때. 그와 일행은 능 앞 석마(石馬)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홍릉은 일본 자객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가 묻힌 곳이다. 당시 황실의 외교 의례를 맡았던 독일 여성 엠마 크뢰벨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그토록 무례한 짓을 저지르다니. 하지만 앨리스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20세기 초 약소국이 겪어야 했던 비운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딸 이방카 고문(37)이 25일 평창 올림픽 폐회식을 찾는다. 정부가 정상급 의전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그를 사로잡을 파격적인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 이방카가 좋아서가 아니다. 싫든 좋든 세계 최고 권력자의 딸이고 정식 직함 없이 한국을 찾았던 앨리스와 달리 ‘백악관 고문’ 타이틀도 갖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녀들은 물론 생후 16개월부터 중국어를 배운 이방카의 딸 아라벨라(7)를 ‘꼬마 외교관’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정치인에게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방카는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다. 최근 미 정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언론인 마이클 울프의 책 ‘화염과 분노’에 따르면 이방카는 이미 대선 출마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다. 이방카의 방한 성과가 한 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국제사회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이방카가 지난해 11월 일본을 찾았을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최고급 료칸에서 프랑스 요리를 대접했고 직접 꽃다발과 선물을 줬다. 이방카가 이끄는 여성기업인지원기금에도 무려 5000만 달러(약 540억 원)를 내놓았다.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
#앨리스 루스벨트#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방카 고문#평창 올림픽 폐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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