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 아닌 패자에 주목한 力著, 손일의 메이지유신 탐구서
신정부의 대역죄인 에노모토, ‘나라의 미래’ 위한 인재라며 메이지 실세들은 사면 뒤 중용
한국은 비좁은 인재 풀에서 언제까지 내편 네편 나눌 텐가
우리는 음력설을 주로 쇠지만 일본은 신정 연휴를 보낸다. 메이지 시대의 대변혁에서 음력을 버리고 명절도 양력으로 바꾼 이후부터다. 일본 근대화의 서막이라 할 메이지 유신이 올해로 150년을 맞는다. 그래서 이번 설 연휴는 700쪽이 넘는 책 ‘막말(幕末)의 풍운아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 유신’에 과감히 도전했다.
새로 들어선 정부에 결사 항전했던 옛 막부 쪽 인물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을 종횡무진 탐구한 이 역저의 주역은 에노모토 다케아키. 유신의 간판스타 사카모토 료마도, 일등공신 사이고 다카모리도 아닌, 그 반대편에 섰던 패자들 중 한 사람이다. 이 책은 그래서 정치적 패배의 숙명을 짊어진 한 개인의 평전이자, 또 그의 나라가 지역적 분열을 거쳐 국가적 통합으로 나아가 강국으로 도약해 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이런 독특한 접근은 저자인 손일 전 부산대 교수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 지리학자인 그가 역사 전공이 아님에도 이 방대한 역사물을 집필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순항엔 신정부에 묵묵히 협력한 옛 막부정권 인재들의 보이지 않는 기여가 크게 작용했음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책은 나에게 이웃 나라에 대해 무지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부끄러움을 일깨워줄 정도로 일본이 통과한 질풍노도의 시간을 꼼꼼히 되짚는다. 에노모토의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인생 여정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유학생 출신의 이 청년은 충성을 바친 막부정권이 무너졌음에도 단독으로 함대를 이끌고 홋카이도로 탈출해 하코다테 정권을 세운다. 신정부에 끝까지 각을 세운 그는 결국 패해 감옥에 갇힌다. 여기까지는 에노모토의 드라마, 그 뒤로 다른 드라마가 시작된다. 참수돼야 마땅할 이 대역죄인 정치범은 2년여 만에 특별사면을 받고 풀려난다. 죄의 사함과 더불어 지질학 화학 등 그의 지식을 활용할 관직이 주어진다. 그리하여 훗날 외무대신 체신대신 농상무대신 등 최고의 관료로 승승장구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신정부군의 지휘관 구로다 기요타카를 비롯한 당시 실세들의 구명활동 덕분이었다. 구로다는 당시 말했다. “에노모토가 홋카이도로 간 것은 나라를 위한 길이다. 만약 그를 처형할 예정이라면 먼저 나를 죽여라.” 그만큼 적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열강과의 외교에 필요한 외국어 실력에다 홋카이도 개척에 필요한 역량을 갖춘 인물을 달리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실리적 판단이었다. 에노모토는 학자로 외교관으로 그 기대에 값하는 활약을 펼쳤다.
우리의 현실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직전 정권에서 잘나갔던 테크노크라트는 다음 정권에서 어김없이 찬밥 신세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5년마다 반복된다. 인맥,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외교 안보 분야도 마찬가지. 위안부 합의 협상의 실무를 맡았던 대사를 갑작스럽게 불러들인 것이나, 전직 장관이 아베 신조 총리를 ‘큰형 믿고 앞에서 소리 지르는 졸개’라고 깎아내리는 것 등이 우리의 퇴행적 현실이다.
메이지 초기의 지형도를 살펴본 이 책의 취지는 ‘일본에는 있었고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을 짚어내고자 함이었다. 쇄국과 개국을 둘러싼 갈등과 반목이 극에 달하고 암살과 테러가 빈발했던 혼돈의 격랑을 헤치고 근대로 도약한 일본. 그 저력은 시대의 큰 흐름을 제대로 읽은 데서 나왔다. 고통과 굴욕을 안긴 상대의 실체는 무엇인지 철저히 파악하려는 시도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으며, 앞으로는 있을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손일 교수는 서문에서 밝혔다. “일본의 패악을 잊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모든 사안에 대해 과거 피해 운운하면서 단선적으로 즉흥적으로 피상적으로 대응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라면 시도 때도 없이 애국자 코스프레 하려 드는데, 그러지 말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코스프레는 역사를 넘어 점점 범위를 넓혀 가는 양상이다. 우리끼리 적대시하는 고약한 버릇이 도진 것인가. 영화 ‘라이온킹’의 대사가 떠오른다. ‘과거는 아플 수 있어. 하지만 둘 중 하나야. 과거로부터 도망치든가 배우든가.’
1876년 2월 27일은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날. 그때 일본의 전권대사가 바로 에노모토를 구명한 구로다였다. 구로다는 에노모토를 구했고, 두 사람은 일본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쳤다. 그 시절 조선은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다. 한쪽은 어둠을 벗어나는 출구에 서있었고 한쪽은 암흑으로 빠져드는 입구에 서있었다. 왜 그랬을까. 3·1절을 앞두고 새삼 드는 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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