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미국 뉴욕의 맹추위에 시달리다가 문득 꽃 생각이 났다. 향긋한 꽃 한 송이라도 화병에 꽂아 봄을 재촉하고 싶었다. 맨해튼 미드타운 동쪽 한 꽃집에 들렀다. 슈퍼마켓 한쪽 외벽에 간이 천막을 치고 화분과 꽃을 진열하고 파는,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였다.
“한국분이세요?”
화분 뒤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우리말로 말을 걸어왔다. 재미동포인 그는 이것저것 꽃을 권했다. 덤으로 꽃 한 송이를 챙겨줄 테니 퇴근길에 들러 달라고 했다. 24시간을 문을 여니 언제든 와도 된다며 푸근한 엄마 미소를 지었다.
뉴욕은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데, 설마 한밤에 꽃을 사는 이가 있을까. 그는 “천막을 치고 꽃을 팔기 때문에 화분을 다 치울 수가 없다. 누군가는 밤새 꽃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향긋한 꽃 냄새와 그의 환한 미소 뒤로 이민 1세대의 눈물과 진한 땀 냄새가 훅 밀려와 가슴이 먹먹했다.
아프리카보다 못살던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이민자. 영어도 서툴고 뒤를 봐주는 이도 없는 이들은 맨주먹으로 일어섰다. 한 주재원은 “뉴욕의 경제권을 쥔 유대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한 동포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가 단지 그 때문에 개종한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유대인들이 야르물케(정수리 부분을 덮는 둥근, 유대인 남성들의 전통 모자)를 쓴 동양인을 그냥 지나치진 않았을 거다.
이민 1세대는 악착같이 돈만 번 게 아니다. 미국 사회 어느 민족 못지않게 훌륭하게 자식들을 키워냈다. 지난해 맨해튼 22번가에 레스토랑 ‘꽃(COTE)’을 창업한 사이먼 김(37)은 13세 때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 1.5세대. 그의 어머니는 한인타운에서 한식당을 했지만, 그는 미국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고 맨해튼의 유명 레스토랑인 장조르주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한인타운 밖에서 도전을 시작했다. 김 사장은 “한식에 뿌리를 두고 맨해튼에서 꽃을 피우겠다는 뜻에서 식당 이름을 ‘꽃’이라고 지었다. 이 식당은 올해 고급 식당의 상징인 미슐랭가이드의 별을 받았고, 요식업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제임스 비어드 상의 최종 후보 15개에도 들었다.
김 사장처럼 한국인의 DNA를 갖고 영어와 미국 문화에도 익숙한 한인 2, 3세 창업자들은 한류 전도사로 미국 사회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올해 11월 미 중간선거를 앞두고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79) 이후 20년 만에 연방의회 입성을 노리는 젊은 한인 10여 명도 열심히 뛰고 있다. 얼마 전 한국계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의 주한 미대사 내정이 철회됐을 때 한국과 동포 사회의 아쉬움이 컸다.
115년 역사를 가진 200만 명의 미주 동포 사회는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한미동맹의 든든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민 1세대 비중이 절반 밑(48%)으로 떨어지면서 한국어, 한국 문화, 한국과의 유대 등이 약해지는 이른바 ‘민족성 소모(Ethnic Attrition) 현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동맹 이간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광풍 속에 한미관계의 위기감마저 고조되고 있다.
이민 1세대가 퇴장하더라도 2, 3세들이 한국인 정체성을 잊지 않고 미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동포 사회는 시들지 않을 것이다. 젊은 한인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투자를 더 늘려 동포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들은 우리에게로 와 경제와 안보동맹의 시들지 않는 꽃으로 만개할 것이다. 맨해튼 ‘24시 꽃집’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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