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설 즈음 사람들이 많이 찾던 옅은 주홍색 장정의 얇은 책이 있다. 올해라면 ‘무술년 대한민력’이다. 그게 책이냐 할지 모르지만 엄연히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가 부여된 단행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운전면허학과시험문제집’과 함께 숨은 베스트셀러였지만 지금은 판매가 신통치 않다. 대한민력은 책력(冊曆), 즉 음력 기준으로 한 해의 육십갑자 월일과 절기 등을 정리한 달력의 일종이다.
책력은 음양오행과 풍수 방위에 따른 간단한 길흉 지침도 담고 있어 점치는 책 역할도 했다. ‘토정비결’과 함께 갖추는 이가 많았다. 국권을 빼앗긴 뒤 1911년부터는 일제 당국이 일본의 축일(祝日)과 농사 절기 등을 추가한 ‘조선민력’을 펴냈다. 조선의 마지막 달력은 1910년 ‘융희 4년 명시력(明時曆)’이다. 달력을 통제하는 이가 시간과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달력과 권력’(이정모, 부키)이라는 책제목이 말해준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마천의 ‘사기’에 ‘역서(曆書)’가 있고 반고의 ‘한서’에는 ‘율력지(律曆志)’가 있다. 역사서에 달력이 포함된 이유는 하늘의 일과 인간의 일이 서로 응하여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책력으로 보물 제160-10호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이 있다. 서애 류성룡이 당시 중요한 사실들을 ‘대통력’이라는 책력에 적어 둔 것이다.
서양의 대표적인 달력 문화유산은 15세기 초 부르고뉴공국의 랭부르 형제가 만든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다. 계절 별자리, 날짜, 해와 달의 변하는 모습 등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맞는 기도문을 싣고 채색 삽화를 담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1732∼1757년에 펴낸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조민호 옮김, 휴먼하우스)에는 여백에 금언이 실려 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책임을 져야 하듯이, 불필요한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시인 조지훈의 수필 ‘원단(元旦) 유감, 캘린더의 첫 장을 바라보며’가 세월과 세상사에 관한 큰 울림을 준다. ‘동지는 가고 새해는 왔으나 겨울은 아직 다 가지 않았고 봄은 먼 곳에서 보일 듯 말 듯 모르겠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흙덩이 밑의 새싹을 그저 느껴서 알 뿐이다. (중략) 낡은 것과 싸우는 동안에 새것도 그대로 낡아 간다. 의(義)도 권력과 결부되면 불의를 닮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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