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김정은의 통 큰 대우·제안…김일성 유격대 시절 보여준 북한식 협상의 전형
벼랑 끝에서 더 큰 역제의, 순식간에 시혜자로 탈바꿈… 협상과 이행은 완전 별개로
진정한 비핵화-개혁·개방까지 양보 아닌 감시가 필요하다
‘통 큰 지도자’를 검색하면 최다 등장인물이 북한 김정일일 듯싶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 순안공항까지 영접 나오는 파격 행보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6·15남북공동선언까지 성사시켜 ‘통 큰 정치’를 그해 유행어로 등극시켰다.
독재자가 뭔들 못하랴만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감동 또는 놀라움을 안기는 ‘광폭정치’는 김정일 일가의 통치 스타일인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 로켓맨이라 조롱받았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단 한번 한국 대통령 특사단과의 협상을 통해 통 큰 결단을 내린 세기의 지도자급으로 돌연 주목받는 모양새다.
김정은이 진정 핵·미사일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간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경수로도 좋고,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 같은 곳도 백 개 천개 만들어 북한 주민들이 잘살 수 있게 된다면 광화문에서 만세를 부르겠다.
그러나 김정은의 통 큰 정치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세계를 속였던 김정일의 협상과 닮은꼴이 될까 걱정스럽다. 이번 특사단과의 협상은 김정은이 외모까지 닮은 할아버지 김일성이 1933년 중국 군벌 출신 구국군 우이청(吳義成)과 동맹 맺기에 성공했던 담판과 흡사하다. 당시 구국군 행패에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김일성 유격대의 처지는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낸 2000년의 김정일이나 민족공조가 절실한 지금의 김정은처럼 진퇴양난이었다.
북한 협상가들 사이에 학습되고 있다는 ‘북한식 협상의 전형’, 우이청 담판의 첫째 법칙은 통 큰 자세다. 김정은은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예년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며 뜻밖에 통 큰 이해심을 보였다. ‘또 한번의 결단으로 이 고비를 극복하기를 기대한다’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던 특사단을 감동시킨 것이다. 김일성도 구국군과 적대관계를 풀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우이청으로부터 자기네 낡은 총과 김일성의 신총을 바꾸자고 제안받자 “거저 줄 수도 있다”고 통 크게 말했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더 큰 제의로 판을 바꾸는 것이다. 김정은이 “한반도 정세가 안정기로 진입하면 한미 훈련이 조절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인 것은 상황이 달라지면 훈련도 축소 또는 취소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북-미 관계 정상화에 따라선 주한미군 철수는 물론 한미동맹까지 뒤흔들 수 있는 얘기다.
김일성 역시 “궁색하게 그런 놀음 할 거 있느냐. 일본 군대와 한바탕 싸우면 될 터인데”라며 아예 연합작전을 역제의함으로써 유격대 공작요원을 구국군 부대에 투입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구국군에 시달리던 처지에서 당당히 공조를 하는 신분으로 바꿔낸 것이다.
둘째 법칙은 선전선동과 사실 왜곡이다. 특사단에 따르면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밝히면서도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는 미국 때문에 핵·미사일 무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선전선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일성도 “당신네 공산당은 남자, 여자 구별 없이 한 이불 밑에서 자고 남의 재산 막 빼앗는다는데 사실이요?”라는 질문에 “우리도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도 “그런데 지주들도 나쁘다”며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잘못이 있다 해도 잘못을 유발한 쪽이 더 나쁘다고 덮어씌우는 공산주의자들 수법이다.
가장 겁나는 세 번째 법칙은 협상과 이행은 별개라는 점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켰던 로버트 갈루치도 9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플루토늄 동결을 약속했지만 북한은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을 하고 있었다”며 북한의 속임수에 치를 떨었다.
김정은이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했다’는 특사단 발표문은 믿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협박이다. 그럼 북이 핵무기를 ‘통일탄’으로 언급하고, 연방제 통일 아니면 전쟁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김일성 역시 일단 위기를 넘기자 합의기구를 깼다는 것이 ‘북한식 협상의 전형’ 논문을 쓴 김해원의 연구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비핵화 협상에 나서는 것은 안 나서는 것보다 낫다. 이제는 우리도 김정은 왕조의 협상법칙을 안 이상, 통 큰 제안이나 사실 왜곡에도 유리그릇 다루듯 할 일이 아니다. 양보만 하면 그들은 우리가 약한 줄 안다. 협상을 하고 이행할 때까지 눈만 부릅뜰 게 아니라 힘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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