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송(北宋)의 왕안석은 학문을 권하는 글에서 ‘여유 있거든 서재를 짓고, 여유 없으면 책궤(冊櫃)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조선 정조 때 재상 채제공은 ‘책궤명(銘)’에서 책궤의 덕을 칭송했다. ‘책 안에 도가 실렸고 너는 그 책 싣고 있으니, 지각 있는 생물은 아니로되 성인(聖人)이라 하겠구나.’
‘후한서’에 따르면 이고(李固·93∼147)는 ‘늘 걸어서 스승을 찾아다녔다’. 이 부분에 ‘부급(負(겁,급))하여 스승을 찾아 10년 동안 오경(五經)을 공부했다’는 주석이 달렸다. 급((겁,급))은 휴대용 책궤, 부(負)는 짊어진다는 뜻. 이로부터 부급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공부하러 간다는 뜻이 됐고, 유학 떠나는 것을 부급종사(負(겁,급)從師)라 하였다. 현대 중국의 쑨원도 ‘중국혁명사’(1923년)에서 말했다. ‘청나라가 쇠퇴하여 환란이 극에 달하자 근심 발분한 사대부들이 부급하여 유럽, 미국, 일본으로 향하였다.’
시인 이시영은 시 ‘툇마루’에서 회고한다. ‘아버지 방이 있던 사랑채에 툇마루가 있었던가? 수저를 놓자마자 부리나케 안마당을 가로질러 가슴 콩닥이며 열던 아버지의 책궤. 그 두툼한 자전(字典) 속에 포개진 시퍼런 백환짜리를 훔쳐 매점에서 모찌떡 많이 사먹었다.’ 국문학자 일석 이희승은 6·25전쟁 때 장서를 궤짝에 넣어 피란을 갔다. 전쟁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책 넣은 궤짝을 그대로 쌓아 서재를 꾸몄다.
기호학자이자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인쇄공이었던 할아버지가 남긴 책 궤짝을 통해 책과 처음 만났다. “난방을 위한 석탄이나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지하실에 내려갈 때마다 아직 제본되지 않은 책들, 여덟 살배기 꼬마에게는 굉장한 분량이었던 그 모든 책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답니다. 그야말로 별의별 책이 다 있었고, 그것들은 나의 지성을 일깨워 주었죠.”(‘책의 우주’, 임호경 옮김)
참고서를 갖고 다니는 학생 외에, 가방에 책을 담아 메고 다니는 이는 얼마나 될까? 16세기 조선의 권호문이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에서 말한다. ‘부급동남(負(겁,급)東南)해도 이루지 못할까 하는 뜻, 세월이 물 흐르듯 하니 못 이룰까 하여라.’ 책궤 지고 부지런히 배우러 다녀도 학문과 입신의 길은 멀고 세월은 빠르게만 간다. 짊어지진 않더라도 한 권쯤 책을 갖고 다닐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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