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아파트 흔적’ 단지마다 남겨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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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애진 산업2부 기자
주애진 산업2부 기자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거리를 지날 때면 시멘트 기둥 3개가 덩그러니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아현고가도로의 흔적이다. 이 도로는 1968년 9월 19일 개통한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다. 한때 서울시청과 신촌을 연결해 교통 혼잡을 해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흉물 취급을 받다가 2014년 3월 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시는 철거과정에서 이 도로의 일부를 남겨 보존했다. 서대문구에서 10여 년간 산 나는 남아있는 기둥을 보며 고가도로가 있던 시절의 충정로를 한 번씩 떠올린다.

2014년 개관한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도 세련된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흔적을 갖고 있다. 공원 한쪽에 서있는 야구 조명탑이다. 덕분에 이곳이 ‘한국 야구의 메카’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 1925년 경성운동장으로 출발해 1959년 정식 야구장이 된 뒤 한국 프로야구의 첫 페이지(1982년 3월 27일 개막전)를 열었던 곳. 살아남은 조명탑은 추억을 빼앗긴 이들에게 한줄기 위로 같은 존재 아닐까.

이처럼 도시가 남긴 흔적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그런데 서울시가 추진 중인 ‘아파트 흔적 남기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주거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아파트를 재건축할 때 그 일부를 보존하라는 것이다.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와 서초구 반포주공 1단지(1·2·4주구), 강남구 개포주공 1단지 등이 대상이다. 잠실주공 5단지는 최초로 중앙난방이 도입됐고, 개포주공 1단지는 난방용 연탄아궁이가 존재했다는 점이 이유다.

남은 흔적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조합과 시가 협의해서 정하게 된다. 잠실주공 5단지는 현재 진행 중인 국제설계공모에 그 방안이 포함된다. 반포주공 1단지와 개포주공 1단지는 각각 108동, 15동을 남겨 주거역사관 등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주민들은 남은 아파트의 흔적이 초고층으로 다시 태어나는 단지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걱정한다. 잠실주공 5단지의 한 주민은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주거문화를 보존할 수 있을 텐데 왜 각 단지마다 흔적을 남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 측은 남겨두는 아파트 동이 기부채납 면적에 포함되고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공공시설의 하나로 활용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낡은 건물이라고 해서 흔적을 지우는 대신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자는 서울시의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문제는 방식이다. 의미 있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공공부문이 앞장서서 보존해야 할 대상은 개별 아파트의 주거양식보다는 더 공적인 기억이어야 하지 않을까.
 
주애진 산업2부 기자 ja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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