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코리아 패싱’의 역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4일 03시 00분


미국서 버려질 걱정하던 韓
북미회담 중매로 분위기 반전

서영아 도쿄 특파원
서영아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6일 저녁을 강타한 한반도발(發) ‘빅뉴스’들(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명, 남북 정상회담 4월 개최 등)에 대해 7일 밤까지도 직접 코멘트를 내놓지 않았다. 북한이 새벽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해도 몇 분 뒤에는 기자들 앞에 나타나 북한을 비난하던 그로선 이례적이었다. 이날 보도된 그의 유일한 언급은 미국 출장 중인 가와이 가쓰유키 외교특보와 통화에서 말했다는 “당분간 대북 압력을 높이며 각국과 연대해 상황을 볼 것”이란 내용이었다.

8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응하겠다고 나서자 일본 정부의 당혹감은 극에 달했다. 아베 총리는 9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고 다음 달 초 직접 방미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일본은 초고속으로 진척되는 상황에서 소외되지 않겠다는 듯,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는 데 필요한 초기 비용을 대겠다고 나섰다.

그런 와중에 도쿄 주재 한국특파원들의 모임이 있었다. 모두 조금은 들떠 있었다. 그간 아베 정권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대북 ‘압박’을 강조해 왔다. 그럴 때마다 ‘코리아 패싱’이란 단어가 떠돌았다. 도쿄 특파원들은 늘 한국에 싫은 소리만을 전해야 했고 당연히 한국에서도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번에 상황이 역전됐으니 다들 묘한 통쾌함마저 느끼는 듯했다.

이 대목에서 2004년 읽었던 빅터 차의 ‘한미일 반목을 넘은 제휴’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는 한일 관계를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매개로 한 의사(擬似)동맹으로 정의하고 역사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이 커지면 양국 관계는 악화되고, 미국이 동아시아를 무시하면 양국은 가까워지는 현상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동맹국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말려드는’ 것과 ‘버림받는’ 것의 2가지 공포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이 두 공포 사이를 오가며 흔들렸다. 냉전시대, 동족상잔의 경험을 가진 한국은 ‘버림받는 것’을 더 두려워했고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도 있어 ‘말려드는 공포’가 더 강했다.

지금 상황은 반대다. 일본은 2014년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헌법 해석 변경, 2015년 이를 위한 안보법제 제정·개정을 통해 이미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아베 정권은 북한과 중국이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과 일체화해 군비를 확장하고 동아시아에서 설 자리를 찾고 싶어 한다. 반면 한국은 냉전 종식 이후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이란 현실 속에서 미중 간에 균형을 의식하고 북한과는 평화 공존을 모색한다. 이런 구도에서 미일 관계가 긴밀해지면 ‘코리아 패싱’, 한미 관계가 긴밀해지면 ‘저팬 패싱’이란 말이 튀어나온다.

빅터 차는 9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실패하면 미국과 북한이 전쟁의 벼랑 끝에 서게 된다”며 주도면밀한 준비를 호소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정상급 교섭이 실패하면 다른 외교수단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사에 남을 극적 변화’를 위해 앞으로 두 달, 유리그릇 다루듯이 신중하게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변수와 난관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승자의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고 만사 튼튼하게 다져야 할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가 애타게 궁금해하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문제도 한국이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 납치 문제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고 ‘한마디’ 거든다고 크게 손해 볼 일도 없다. 극적 변화의 시대, 주변국을 가능한 한 많이 우군으로 확보해서 나쁠 것이 있겠는가.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아베 신조 일본 총리#비핵화#남북 정상회담#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북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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