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이자 가수 에릭 클랩턴이 부른 ‘아버지의 눈’(My Father‘s Eyes)은 애절한 노래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노래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가 열여섯 살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주둔하던 캐나다 병사였던 아버지는 아내에게 돌아가고 없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부재 그 자체였다. 그는 어머니를 누나로 알고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아홉 살 때 그 사실을 알고 바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40여 년 후, ‘아버지의 눈’이라는 노래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의 나이 쉰세 살 때였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아버지의 눈을 볼 때/내가 그를 어떻게 알아볼까?” 절망스럽다. 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몰라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식(“묘목”)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자신의 핏속에서 내내 “함께 있었다는 것을/조금씩 깨달았다”. 함께 있었다면 아버지의 눈도 당연히 ‘보았을’ 터이다. 아버지의 눈을 본 적이 없음에도 ‘보았다’고 말하는 역설이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슬픈 노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몇 년 후인 2004년에 “상실의 감정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섯 살짜리 아들을 잃고 만든 불후의 명곡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과 ‘아버지의 눈’을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가 2011년 2월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공연에서 그 노래들을 부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는지 모른다. 상실의 아픔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애도는 저절로 끝나게 된다”고 했던 프로이트의 말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가 조금씩 무뎌지다가 아문 것일까. 노랫말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그의 “영혼을 되돌리는/치유의 비”가 내린 것일까.
그런 그가 2013년부터 그 노래들을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상실의 감정’ 없이도 그 노래들을 부를 정도로 초연해졌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초연함이, 그러한 감정과의 작별이 왠지 더 짠하게 느껴진다. 그것도 상처의 흔적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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