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하드웨어(HW) 제조 능력을 보유했다. 세계 최초로 5세대(5G) 통신망을 구현할 정도로 통신 인프라도 탄탄하다. 하지만 유독 소프트웨어(SW) 분야는 약하다. 국내 최고의 전문 인력을 보유한 삼성전자마저 “(사진 공유 앱인) 인스타그램은 4명이 6주 만에 개발했다. 삼성이 개발했다면 몇백 명이 붙어 1년은 걸렸을 것”이라며 자책했다.
요즘 서울 대치동과 목동 등에 컴퓨터 언어를 배워 SW를 만드는 코딩학원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SW 산업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우리도 인스타그램 같은 혁신적 서비스를 만드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나의 착각은 금세 깨졌다. 올해 중학생을 시작으로 내년에는 초등학교 5, 6학년들에게 코딩 교육이 정규 과목에 포함되고, 대학 입학에 SW 분야의 특별전형이 확대될 것 같은 분위기에 학원들이 생겨난 것이다. 사고력과 창의력을 기르겠다는 당초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대학 진학에 SW 교육이 필요하다”는 학원가의 ‘불안 마케팅’만 요란했다. 일부에서 대학 입시를 결정짓는 주요 과목이 기존 ‘국영수’에 코딩을 더한 ‘국영수코’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한국 산업의 발전 과정은 서구 선진국과 다르다. 소비자 욕구와 생산자의 창의성이 시행착오를 거쳐 다양한 제품과 기술로 나타나고(A 과정), 시장의 선택으로 주류 상품이 등장하면(B 과정), 오랜 기간 기술과 가격경쟁력 향상으로 대중화되는 단계(C 과정)가 서구 산업의 일반적인 진화 과정이었다.
한국은 A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국가나 기업이 정한 선진국 제품을 모방하는 B 과정부터 시작했다. 필요한 것은 모방을 위한 기술이었다. 제품과 기술 탄생의 맥락을 알 필요도 없었다. 빠르고 싸게 만들어 팔면 성공하는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이다.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한국은 또 다른 빠른 추격자인 중국과 선진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도전적 과제를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선택받는 단계(A 과정)를 생략하면서 ‘축적의 시간’을 쌓지 못하고 결국 혁신 제품을 내놓을 역량도 기르지 못한 탓이다.
나는 최근 한국의 코딩 교육 열풍 역시 A 과정을 생략한 채 B 과정을 위한 기술 습득에 그칠 것 같아 우려스럽다. 우리 아이들이 대학 입시를 위해 학원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을 나이인 열두 살에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학교의 컴퓨터실을 들락거렸다. 그에게 작동법을 알려줬던 교사가 “내가 빌보다 컴퓨터에 대해 많이 알았던 것은 첫날 하루뿐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게이츠는 스스로 몰입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장거리 전화를 무료로 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팔기 위해 10대에 스탠퍼드대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전문잡지를 훔쳐볼 정도였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배우는 코딩은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특정 기술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흥미를 북돋워 주고, 코딩이라는 문제 해결의 도구를 언제든지 주변에서 집어들 수 있게 하는 교육 환경이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를 만든 한국 교육이 또다시 코딩을 재미없는 입시과목 정도로 만들어 ‘코포자(코딩 포기자)’마저 배출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 암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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