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예술계의 성폭력 사건에는 ‘왜곡된 가족주의’가 깔려 있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연극단원들이 ‘다 같이 함께 먹고 자면서’ 연극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술 감독은 가부장적 위계 속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며 극단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집단의 결속 속에서 위력에 의한 성관계가 은폐되어 왔다는 겁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가족’을 구성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관습에는 타인에게 ‘가족처럼 지내자’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명에 가족을 붙여 ‘○○ 가족’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쓰기도 합니다.
사회의 다양한 인간관계를 가족 관계로 치환하고자 하는 욕구에는 가족이 인간 공동체의 이상형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수적으로 작은 규모일지라도 매우 복합적인 인간관계를 내포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족 개념이 내포하는 ‘관계의 미덕’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일반적 사회관계를 형식적인 가족 관계로 치환하는 사람들은 관계의 친밀감을 내세우지만 사실 집단을 결속시키고 위계질서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듯 보입니다. 실제로 우월적 지위에서 남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가족의 이름으로’ 변명하기도 합니다. 공관병을 마구 부린 장군의 부인은 “자식같이 생각해서” 그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직원을 구타한 금융기관의 장은 “자식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때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호칭에서도 사회관계의 호칭을 가족 구성원 사이의 호칭으로 치환합니다. 병원, 상점 등 공공장소에서 나이 든 사람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릅니다.
가족주의적 관습의 배경에는 아주 미묘한 의식의 왜곡이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동네의 자율방범대원 일에 자원봉사하는 것은 귀감이 되는 행동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봉사하는 분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대원은 망설임 없이 답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대하면 힘든 걸 잊고 봉사할 수 있지요.” 이런 개별적 사례는 그 자체로 미담입니다. 하지만 이를 시민 정신의 맥락으로 가져와 보면 미묘한 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을 가족처럼 대할 때 베풀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 바로 ‘남’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타인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고 인간으로서 존엄이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족처럼 대할 게 아니라, 남처럼 대해야 합니다. 합숙하는 연극단원 개개인도 ‘연극촌 가족’이 아니라 각자 남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서로 존중하고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나’라는 주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임’으로 정의합니다. 남을 타인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남을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가족의 개념이 고귀할지라도 타인의 개념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가족으로 치환하거나 그 범주에 포함하려 할 때, 그 의도가 무엇이든 타자성은 상실됩니다. ‘나’ 또는 가족이라는 ‘편협한 우리’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곧 사회관계가 사라지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남을 가족처럼 돌보는’ 피상적 도덕성의 함정 또한 있는 겁니다. 예술촌의 성폭력 사건에서 자율방범대원 인터뷰까지 동떨어진 것 같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된 가족주의의 함정이란 공통분모는 꽤 넓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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