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인찬]남북관계 훈풍 불어도 北에 있는 국군포로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7일 03시 00분


황인찬 정치부 차장
황인찬 정치부 차장
길고 긴 하루였다. 김여정 때문이었다.

지난달 9일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날, 김여정이 한국 땅을 밟았다. 김일성 손녀, 김정일 딸, 김정은 여동생의 등장에 한국은 술렁였다. 그 모습이 TV만 틀면 나왔고, 여론도 떠들썩했다. 김여정이 인천공항에 닿은 비슷한 시각, 서울 종로구 청와대 민원실. 어르신 몇 명이 힘겨운 걸음으로 찾았다. 손에는 A4용지 2장짜리 탄원서가 들려 있었다. 수신인은 문재인 대통령,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었다.

“최근에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 대표부가 방한하는 장면을 따뜻한 아파트에서 TV로 보고 있자니 탄광에서 함께 고생하던 동지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언젠가는 조국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고, 그러면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그 힘든, 짐승만도 못한 탄광생활을 함께하던 동지들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탄원서를 낸 사람들은 6·25전쟁 때 인민군의 포로가 돼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가까스로 탈북한 국군포로들이었다. 아흔 전후가 된 그들의 몸은 이제 쇠약하고, 기억도 희미해졌다. 다만 북에 두고 온 전우들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해 보였다.

“북한이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평균 90세의 국군포로들을 감추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포로들은 수십 년 전 자기 군번과 고향집 주소, 부모님은 물론 일가친척들의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귀환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여정이 온 날은 물론이고 그 후에도 이 탄원서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이들은 문 대통령에게 “북한 대표단을 만나면 이제 국군포로들을 꼭 송환해 달라고 말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김여정의 만남에서 국군포로 얘기가 오갔다는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최근 숨 가쁜 남북, 북-미 정상회담 국면을 보면서 대화 기조가 만들어진 것은 반가우면서도 북한에 있는 억류자(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에 억류됐다가 사망한 대학생 오토 웜비어 얘기를 틈만 나면 강조한다. 물밑 접촉 끝에 벌써 북에 억류된 미국인 3명의 석방이 임박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납북자 문제 해결을 1순위로 꼽는다.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앉은 자리로 먼저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는 어떤가. 정부가 북한에 국군포로 송환을 강하게 요구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정상회담 개최까지 합의한 마당에, 회담 의제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정부가 설명하는 최근까지도 국군포로 문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우선 남북관계 복원을 한 뒤 해결될 문제”라고 했다.

지금까지 우리 곁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81명이다. 이 가운데 29명만 생존해 있다. 북한에는 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나마 정확한 수치도 아니다. 국방부는 “정확한 수는 파악이 안 된다”고 했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에 억류돼 있는 국군포로는 국가의 부름에 나섰던 우리의 앳된 청년들이었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전우들의 기억 속에서만 그들은 살고 있는 것 같다.

다음 달 우리 가수들이 참가하는 화려한 평양 공연이 열리는 그 순간에도, 그들 중 일부는 북녘 땅 어딘가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정부가, 우리가 그들의 반세기 넘은 절박함에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황인찬 정치부 차장 hic@donga.com
#김여정#탄원서#국군포로 송환#북한#국군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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