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니까 기대 걸어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30일 03시 00분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남북, 북-미 릴레이 정상회담의 성공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높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잘될 거라는 낙관으로도 이어진다. 한 지인은 “은퇴 후를 대비해 그동안 경기도 남쪽 농가를 알아봤는데, 이제 북쪽에서도 찾아볼까 싶다”고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엔 비관론이 압도적으로 많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는 만큼 북-미 정상회담이 실제로 열릴지도 의문이고, 열린다 해도 비핵화 합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들 얘기한다.

얼마 전 방한한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도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을 ‘0%에서 1% 사이’라고 봤다. 미어샤이머는 국가는 힘의 균형보다는 힘의 극대화를 통해 패권을 추구한다는 ‘공격적 현실주의’ 주창자다. 그는 일찍이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에서 물려받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핵을 내주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예견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현실화됐다.

이런 냉혹한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에 어느 나라보다 충실한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이 내세우는 핵무장 평화론이 대표적이다. ‘평화애호 핵무장국’이란 선전 논리의 이론적 스승 격인 미어샤이머의 예측을 북한이 벗어날 것 같지 않다.

학자뿐만이 아니다. 북한 정책을 다뤄본 전직 관료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수용 결정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에는 김정은 체제 보장이란 선물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닌가, 충분한 준비도 없이 대통령이 나섰다간 무슨 위험한 사태로 번질지 모른다는 등 분분하다. 정상회담 연기론까지 나온다.

그런데도 유일하게 낙관론을 펴는 이가 있다. 바로 ‘외교의 현자’라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지녔고 당장 그게 바뀔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이 북-미 대화 같은 기회를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전통주의자들이 권하는 방식은 아니다. 한데 그런 방식이 우리가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게 하고, 내켜 하지 않는 나라도 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독특한 스타일? 트럼프의 못 말리는 기질과 괴벽을 에둘러 가리키는 외교적 표현이 노회한 키신저답다. 트럼프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 눈엔 악성 나르시시스트, 성공적 소시오패스, 경조증 환자, 한마디로 위험한 정신병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트럼프가 뭔가 일을 낼 것이라고 키신저는 기대한다. 자신이 보좌했던 대통령, 신경안정제와 알코올에 절어 있었지만 중국 방문 같은 외교적 대사건을 이뤄낸 리처드 닉슨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천재성과 광기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과대망상, 조울증, 의심증, 도덕불감증은 늘 천재에게 잠복해 있다. 대놓고 “나는 천재”라는 트럼프를 두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만, 원래 천재는 겸양과는 거리가 멀다. 남들이 다져놓은 길은 가지 않는다. 또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간다.

김정은은 새해 들어 현란한 언동으로 한반도 정세를 휘저으며 사실상 독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배운 재주를 치밀하게 펼치는 능재(能才)인 것은 맞지만 천재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트럼프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마침 이번처럼 북핵 해결의 기회가 무르익은 적도 없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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