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박민우]‘현대판 파라오’의 대규모 토목공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일 03시 00분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이집트에서 처음 피라미드를 봤을 때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 크기가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기원전 2560년, 그러니까 약 4600년 전 세워진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가 230m, 높이는 147m에 달한다. 이 피라미드를 짓는 데 쓰인 돌의 개수만 230만 개.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다. 이집트에는 ‘모두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피라미드만이 세월을 비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수천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피라미드에서 영생을 꿈꿨던 파라오의 열망이 전해졌다.

오늘날 이집트에는 또 다른 절대자의 야망이 꿈틀거린다. ‘현대판 파라오’로 불리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64)은 장기 독재의 길을 걷고 있다. 이집트 대선 결과가 공식 발표되는 2일은 시시 대통령의 ‘파라오 대관식’과 다름없다. 투표율은 41.5%에 불과했지만 시시 대통령이 약 92%를 득표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군부 출신 시시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30년 독재가 2011년 이집트 시민혁명으로 끝나고 이듬해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자 무함마드 무르시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무르시 정권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정책과 심각한 경제난으로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이집트 내부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시시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하고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발포해 2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실권을 손에 넣은 시시는 2014년 대선에 출마해 손쉽게 당선됐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파라오처럼 시시 대통령은 집권 첫해부터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했다. 그는 외환보유액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채까지 발행해 가며 총 80억 달러(약 8조4800억 원) 규모의 ‘제2 수에즈운하’ 공사를 감행했다. 정부는 새 운하가 개통되면 연간 약 50억 달러인 수입이 2023년까지 연간 130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착공 1년 만인 2015년 8월 새 운하가 완공됐다.

시시 대통령은 대규모 국가 기반시설 프로젝트를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오명까지 떨쳐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집트 정부는 2015년 3월 카이로 동부에 최대 7년간 450억 달러를 투자해 700km² 규모의 신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사막을 개간해 농작물 자급자족을 달성하겠다며 ‘150만 팟단(6300km²)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와 210억 달러 규모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약에 최종 합의했다. 시시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일련의 프로젝트들을 재선을 위한 홍보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시시 대통령이 짧은 시간에 많은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정작 이집트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수에즈운하관리청(SCA)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선박 수는 1만6833척으로 2015년(1만7483척)보다 되레 줄었다. 지난해도 새 운하 개통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결국 시시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에 3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던 중국 회사는 지난해 계획을 철회했다. 농지 개간 사업도 진척이 없다. 정부 재정 적자 탓에 원전은 2020년에야 착공할 예정이지만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40%대 초반의 낮은 투표율로 시시 정권의 국정동력은 더욱 약화됐다. 시시 대통령이 추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효과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면 이집트 시민들은 ‘아랍의 봄’ 때 그랬던 것처럼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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