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염모, 푸른 옷 한벌 염색해주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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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 가격이 옛날보다 세 배나 올라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입니다. 한양에 있는 염색집은 으레 부자가 되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조정에서 조처해야 할 일입니다. ―양성지(梁誠之) ‘눌재집(訥齋集)’

우리나라 사람을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흰옷을 즐겨 입은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온통 흰옷으로 뒤덮인 시장의 모습을 흡사 솜밭 같다고 했다.

흰색은 동양에서 전쟁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원래 상복(喪服)이다. 조선 사람들은 상복을 자주 입었다. 팔촌 이내 친척의 상을 당하면 상복을 입었고, 왕실에 상이 있으면 전 국민이 상복을 입어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경조사에도 입을 수 있고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은 흰옷밖에 없다.

나라에서는 흰옷 입는 풍습을 골치 아파했다. 평상복과 상복의 구분이 없으면 예법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방을 상징하는 푸른 옷을 입으라고 권장했다. 세종대왕은 노란 옷은 중국에서 흉복(凶服)으로 간주하고, 빨간 옷은 여자 옷 같고, 남색 옷은 일본 옷 같으니 푸른 옷을 입으라고 했다.

염색한 옷은 부(富)의 상징이었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부자들이 화려한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바람에 염색 값이 치솟았다고 한다. 가격은 비쌌지만 품질은 좋았다. 우리나라 염색 기술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송나라 사람 왕운의 ‘계림지’에 따르면,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특히 홍색과 자색이 아름답다고 했다. 조선의 자주색 비단에 반해서 10필 넘게 염색해 간 중국 사신도 있었다.

염색은 염모(染母)라고 하는 여성 기술자가 맡았다. 고종 때의 재정백서 ‘탁지준절’에 따르면, 염모에게는 수공포(手工布)라고 하는 수공비를 지급했다. 비단 1필(20m)을 염색하면 삼베 석 자 다섯 치를 끊어준다. 비단 10필을 염색해야 삼베 1필이 될까 말까다. 쌀 대여섯 말 가격이다. 중노동인 염색의 대가치고는 많지 않다. 그래도 달리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감지덕지였다.

호조(戶曹)의 아전 김수팽이 선혜청 아전으로 근무하는 동생의 집에 갔더니 마당에 큰 물동이가 줄지어 있었다. 김수팽이 무엇이냐고 묻자 동생이 말했다. “아내가 염색업을 합니다.” 김수팽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우리 형제까지 염색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느냐?” 김수팽은 물동이를 모두 엎어버렸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활동이 불편하고 세탁이 힘들다는 이유로 흰옷을 버리고 색옷을 입자는 운동이 전개됐다. 처음에는 자발적이었지만 일제는 점차 색옷 입기를 강요했다. 면 직원과 순사들은 흰옷 입은 사람을 보면 먹물을 칠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꿋꿋이 흰옷을 입었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흰옷은 이미 민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백의민족#한복#염색#염모#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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