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들 이견 용납 못하는 트럼프… 윗사람 의중, 알아서 헤아리는 ‘손타쿠’ 풍토에 발목 잡힌 아베
정치의 퇴행도, 권력의 오만도 국가지도자는 철저히 경계해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수시로 고위직을 갈아 치운다. 자기 스스로 임명했던 각료도 참모도 줄줄이 쫓아냈다. 마치 2인 3각 경기처럼 웬만해서는 대통령과 거의 임기를 함께하며 국제정치를 주무른다는 국무장관도 그 조기 퇴임 행렬에 끼었다. 렉스 틸러슨 장관은 1년여 만에 트위터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걸핏하면 파리 목숨처럼 장관이 바뀌는 한국에서 부럽게 여겼던 미국 정치의 전통도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자기 의중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자신과 충돌하는 사람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회장님 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틸러슨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여러 사안에서 의견이 달랐다”고 인정했다. 이런 충동적 행동을 제어할 만한 참모들은 이제 거의 사임하거나 해고됐다고 미 언론은 우려한다. 나라 위한 충정 이전에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만큼 그 밑에서 일하려면 선택은 두 가지뿐. 트럼프 방식대로 하거나, 나가거나. ‘폭풍 해고’를 보면서 트럼프가 뽑은 사람들 중에 온통 예스맨만 있는 건 아니었다는 긍정적 신호를 읽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겠다. 한국이라면 어떨까.
트럼프의 ‘절친’ 파트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곤경은 그 대척점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는 입도 뻥긋 안 했다는데 그 속내를 파악해 ‘입속의 혀’처럼 움직인 관료들로 인해 악재가 겹쳤다. 윗사람의 명시적 지시가 없어도 이를 먼저 헤아려 행동을 취하는, 이른바 손타쿠(忖度) 때문이다. 잘되면 내 덕, 잘못되면 네 탓, 아랫사람에게 부담을 돌리는 책임회피의 구조인 셈이다. 근대 이전의 봉건영주시대의 유습이기도 하다.
국유지 헐값 매각과 관련된 문서조작 파문에 최고의 관료집단이라는 재무성이 쑥대밭이 됐지만, 이에 앞서 문부성이 된통 홍역을 치른 배경 역시 손타쿠의 그림자가 있다. 발단은 아베의 또 다른 사학스캔들을 폭로했던 문부성 전직 차관의 중학교 강연을 문제 삼은 문부성의 과잉충성. 일본 국민이 바보가 아닌 이상 총리에게 밉보인 인물을 콕 집어 조사한 관료들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손타쿠에 민감해서, 다른 쪽은 손타쿠에 무심해서 사달이 났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 팀에서 오래 일하기는 힘들 터다. 다만, 그 정도가 문제이겠다. 일사불란도 좋지만, 때로 입바른 소리도 하는 결기를 가진 이들을 곁에 두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필수 조건이자 복이 아닐까. 물론 아무나 되는 일은 아니고, 그래서 훌륭한 리더도 드문 것이겠지만.
지난 정권의 몰락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터득한 교훈이 있다. ‘문고리 권력’이든 장관이든 고분고분 순종만 하기보다 가끔 뜻을 거역해 직언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윗사람을 구하는 길임을. 리더의 위기는 먼 데 있는 적이 아니라 가까운 곳, 바로 그 권좌의 발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측근의 충성에 취해 있는 동안 이미 자신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전직 여당 의원 20명이 청와대와 공공기관에 재취업했다고 한다. 이 취업난의 시대에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단체 출신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 수장에 참여연대 출신의 전직 의원이 임명됐다. 청와대는 이 모든 인사에 대해 “역량 전문성 등을 고려해 적임자를 선발한 것”이라 말한다. 혹여 ‘손타쿠’까지 염두에 둔 인사라면 어쩌면 그 폐해는 ‘낙하산 인사’ 차원을 뛰어넘는 수준일지 모른다.
관료집단이 영혼 없이 대통령 뜻만 떠받들기에는 나라 안팎 사정이 몹시 엄중하다. 국가지도자가 ‘내 뜻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만 곁에 두고 싶다’는 치명적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공동체의 앞날은 캄캄하다. 국민들 바람 대신 오직 1인의 심기만 챙기는 사람들 손에 나라 운명이 맡겨져 있다면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는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틸러슨 장관은 고별사에서 국무부 직원들에게 “워싱턴은 정말 비열한 곳일 수 있다. 여러분은 여기 동참할 필요 없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당신의 진실성, 이를 포기하든지 타협을 허용하든지 선택은 오직 당신 몫이다.” 대한민국 관료에게는 먼 나라 얘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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