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은 바람처럼 빨랐다. 어린 나도 어른들 따라 일찌감치 TV와 마주앉았다. 그때가 1985년 9월이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행사가 진행됐고, 북한은 이를 생중계했다.
내가 본 첫 남쪽 예술이었다. 그러나 부푼 기대는 이내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피식 빠졌다. 예술인처럼 보이지 않는 노인들이 느릿느릿한 가야금에 맞춰 이상한 발성으로 목청을 뽑았다.
어머니는 전통 가야금과 판소리라고 말해주었다. 참고로 북한은 1960년대에 가야금을 기존 12현에서 21현으로 개량했고, 판소리는 음악계에서 퇴출시켰다.
난 공연을 보다 잠들었다. 그렇게 졸음을 부르는 음악은 처음이었다. 이후부터 “예술은 북쪽이 훨씬 앞섰다”란 당국의 선전을 확실히 믿었다. 내가 봤으니까.
그러다 1997년 겨울 평양행 열차에서 ‘홀로 아리랑’을 만났다. 당시는 전력난으로 기차가 수백 km를 가는 데 일주일씩 걸렸다. 사람들은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추위와 무료함을 달랬다. 어느 밤 객차 앞쪽에서 청년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와 창법이었다. 사람들은 연방 재청을 외쳤고, 나 역시 그랬다. 전율을 느낄 만큼 좋았다. 탈북해서야 그날 밤 청년이 부른 노래들이 한국 가요였고, 그중 하나가 홀로 아리랑이란 걸 알았다. 어둠에 얼굴을 숨겼던 그 청년은 노래를 참 잘했다. 그가 어디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초기에 탈북해 중국에 갔다 왔던 청년은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고, 지금은 북한 사람들도 웬만한 한국 노래는 다 안다.
남북 간 예술 교류도 적잖았다. 가장 화려했던 공연은 2005년 8월 조용필 평양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공연은 훌륭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조용필은 “함께 불러요. 다 아시죠”라고 객석에 호소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객석의 7000여 평양 시민 중 이 노래를 모를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누가 간 크게 호응한단 말인가.
카메라에 비친 얼굴들은 썰렁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눈물 가득한 눈은 감동으로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따라 부르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오물거렸다. 급기야 마지막엔 몇 명이 조용히 따라 불렀다. 카메라에 잡힌 이들이 보위부에 끌려가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예전엔 평양 가는 가수들에게 “당신이 들려주고 싶은 곡이 아니라, 탈북 예술인들과 상의해 그들이 듣고 싶은 곡을 선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런 생각도 바뀌었다.
가령 2002년 9월 윤도현밴드가 평양에 갔을 때 “저 록(Rock) 버전 아리랑을 북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탈북한 평양 청년은 “처량한 줄로만 알았던 아리랑이 저렇게 신나는 노래가 될 수도 있구나 싶어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너를 보내고’는 북한 국민가요가 돼 버렸다. 얼마 전 마이클 잭슨의 공연 영상을 몰래 보고 미치도록 황홀했다는 탈북 예술인도 만났다. 평양은 마이클 잭슨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 사람들도 친지끼리 모이면 남한 사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놀고 잘 춤춘다. 한민족 특유의 음주가무 DNA가 어딜 가겠는가.
평양에서 공연한 이들은 객석의 무반응에 당황한다. 지금까진 부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꾹 다문 입술이 평양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보며 난 평양이 또 많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공연장의 평양 시민들은 김정은 앞에서 노래에 맞춰 손도 흔들고 소리도 질렀다. 김정은이 직접 “우리 인민들이 남측의 대중예술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진심으로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고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면, 이건 대단한 파격이다. 다만 과거엔 이런 공연을 생중계하던 북한이 이번엔 중계를 하지 않았으니 말과 행동의 괴리는 크다. 한국 노래만 불러도 여전히 잡혀 갈 것이다.
그럼에도 13년 만에 재개된 평양 공연을 보며 새삼 느꼈다. 평양의 예술혼은 잠들지 않았고, 잠든 적도 없었고, 다만 억눌려 있었을 뿐이다. 평양의 얼어붙은 가슴들을 깨워주는 이 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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