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장관이 된 뒤 어디에 가든 비상등이나 대피로부터 확인하는 직업병이 생겼다. 비상구를 막은 물건은 없는지, 제대로 된 소화기가 있는지 습관적으로 살핀다. 집 앞 단골 사우나에서도 그랬다. 다닌 지 몇 년 됐지만 미처 보이지 않던 취약점이 보였다. 어렵게 찾은 비상구 계단은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사장님은 “대피로를 조만간 확보할 예정”이라고 넌지시 말씀해 주셨다. 최근 다시 가 본 사우나는 비상구 주변이 말끔해졌다. 하지만 이런 위험요소가 전국 곳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30년 전과 비교해 삶은 놀랍도록 달라졌지만 크고 작은 재난과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그때마다 정부는 대책을 강구하고 노력하지만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재난 대응 현주소는 제자리걸음이다.
안전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보는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 안전조치를 비용이나 규제로 보는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값싼 드라이비트 외장재나 폴리에스테르 천막이 아니었다면 제천 스포츠센터에서, 대구 서문시장에서 값비싼 희생은 없었을지 모른다. 안전교육이나 화재 대비 훈련을 충실하게 했다면 밀양 참사는 없었을지 모른다.
미국은 1973년 2년간 연구 끝에 현재의 소방안전 관련 조직, 제도, 교육시스템의 기초가 된 ‘아메리카 버닝리포트(ABR)’를 작성했다. 당시 미국 화재사망률은 캐나다의 2배, 영국의 5배, 일본의 6.5배였다.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소방안전 후진국에 가까웠다. 보고서가 채택된 후 미국은 연방 소방국, 소방학교, 화재연구센터, 국가화재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화재 예방교육을 하고 건축물을 설계할 때 화재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도록 법제도를 정비했다. 스프링클러, 화재감지기 설치가 의무화된 것도 이때다.
대한민국은 1인당 소득 3만 달러가량의 경제규모 10위권 국가지만 안전 인프라는 초라하다. 소방인력은 부족하고 지역별 장비나 시설투자 격차는 크다. 소방학 관련 석사를 배출할 수 있는 종합대학은 3곳뿐이고 정책연구기능도 흩어져 있다. 민간 기술 개발과 소방안전시설 투자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도 부족하다.
올 2월 말 서울 세브란스병원 화재는 꾸준한 안전투자의 결실이다. 식당이 전소될 만큼 큰불이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고 불이 번지지도 않았다. 스프링클러, 방화셔터는 정상 작동했다. 1년간 10번 가까이 받은 소방훈련으로 익힌 경험과 매뉴얼에 따라 차분히 대응한 직원들 덕도 컸다.
2월 5일 시작한 국가안전대진단이 13일 종료된다. 주무 장관으로서 수차례 현장에서 불시 점검해 본 결과 허점이 많다. 손볼 곳도 수두룩하다. 정부 ‘화재안전대책 특별 TF’는 ABR급 종합안전대책을 도출할 것이다. 땜질 처방이 아닌 장기 청사진이다. 안전에는 지름길도, 무임승차도 없다. 우리 모두가 안전에 꾸준한 관심을 쏟고 투자할 때 안전사회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