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가 삼성증권에서 벌어진 일을 먼저 소설로 썼다면 나는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너무 작위적인 스토리 아닌가,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 대한민국 증시가 무슨 야바위판인 줄 아느냐 등의 반응을 보였을 듯하다. 내가 틀렸다. 소설로도 차마 못 쓸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클릭 한 번에 유령 주식이 대거 나타났고 일부 직원은 이를 얼씨구나 매도하며 시장을 교란했다.
나는 사고에 관여한 두 부류의 직원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먼저 ‘원’ 대신 ‘주’를 입력하는 실수를 저지른 직원.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범했음은 명백하나 악의가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에게 지난 며칠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을 테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파장 속에 머리를 쥐어뜯지 않았을까. 나는 그에게 모종의 동정을 느낀다. 징계를 피할 순 없겠지만 이 일로 그의 미래가 너무 어두워지지는 않길 바란다.
하지만 주식을 내다 판 16명은 다르다. 그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지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생 한 방’을 외치며 부당 이득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실체가 유령 주식임이 공론화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돈을 쥐기는커녕 거액을 물어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나는 그들에겐 조금도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는다. 도리어 증권업계에서 퇴출되기를 바라는 축이다.
이 건이 특정 개인과 집단에 책임을 전가하는 ‘꼬리 자르기’로 전개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문제의 핵심은 예탁결제원을 거치지 않고도 주식이 발행돼 실제로 거래됐다는 점이다. 삼성증권 내부의 전산, 통제 시스템을 넘어서는 한국 증시 차원의 구멍이기에 최종 책임 주체는 엄연히 금융 당국이다. 여느 때처럼 책임을 묻겠다며 ‘갑질’하는 태도로 감사에 임해 그걸로 끝낸다면 그 또한 적폐다. 당국은 삼성증권에 책임을 전가하고, 삼성증권은 관련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구도를 예상하는 건 비단 나뿐일까.
완벽한 개인도 없고 완전한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좀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유인 체계를 갖춘 방향으로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되 곳곳에 존재하는 틈새를 신뢰에 근거해 메워 나가야 한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개인을 시스템의 일원으로 존중하는 동시에 과도하게 영웅시하거나 악마화할 거리를 가급적 주지 않는 사회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 일상은 반대다. 개인은 시스템의 일원으로 존중받기보다는 도리어 순종하기를 강요받는 게 표준이고, 특정인을 영웅 또는 악마로 부각함으로써 시스템의 결함을 덮는 사례 역시 흔하다.
이국종 아주대 교수를 생각해보자. 대중에게 그는 영웅으로 각인돼 있지만 그 이면에는 외상외과 시스템의 결함이 자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삼성증권 직원들의 사고 이면에도 금융 시스템의 결함이 있다. 양쪽 다 그 결함이 아니면 애초 주목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낭만 또는 망상일 수 있음을 안다. 그래도 현실이 소설보다 더 작위적인 세상이니 소설가에게 이 정도 허튼 꿈은 허락해줘도 되지 않느냐고 항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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