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로 식품업계에 잘 알려진 이야기다. 국내 간장제조업체의 중간간부였던 A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 일본의 Y간장㈜이 메주를 발효시킬 때 어떤 곰팡이를 쓰는지 궁금해서 현지 견학을 갔다. Y간장㈜이 영업기밀을 쉽게 알려줄 리 만무했다. A는 몇 번에 걸쳐 통사정을 한 끝에 메주 발효실에 잠깐 들어가 볼 기회를 얻었다. A는 발효실에서 나오자마자 코를 풀었고, 코 묻은 휴지를 곱게 싸서 한국으로 가져왔다. 휴지에는 발효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곰팡이 포자가 묻어 있었고, A는 분석 작업 끝에 Y간장㈜이 쓰는 곰팡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영업비밀이나 지식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느슨한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하지만 공기처럼 사소한 것에도 중요한 영업비밀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앞선 기술이 집적된 시설을 꼽으라고 한다면 삼성전자 평택공장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중 최첨단인 4세대 3차원(3D) V낸드플래시가 생산된다. 핵심 기술이 집약된 만큼 이곳의 보안시스템과 절차는 철통같다. 임직원들조차도 휴대용 저장장치는 물론 종이 한 장도 가지고 출입할 수 없다. 안에서는 특수처리된 보안용지만 사용해야 한다. 보안용지를 갖고 나가려 하면 입구에 설치된 감지기가 바로 적발해낸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영업비밀 보호 시스템이 통째로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일이 최근 벌어지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 평택공장 등의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일반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측정보고서에는 공정 순서와 개별 장비 배치도, 사용하는 화학제품 종류와 사용량 등 “30년 노하우가 들어 있다”고 한다. 측정보고서를 ‘일반 공개’한다는 것은 산업재해 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도 보고서 복사본을 통째로 준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가 이 복사본을 홈페이지에 올려놔서 중국 등의 경쟁업체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해도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산업재해를 다투려는 노동자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노동자가 소송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라면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에 제약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측도 반도체 관련 직업병 당사자나 가족, 변호사 등 관계자들이 해당 보고서를 열람하고 그 결과에 대해 공증을 받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고 있다. 쟁점은 ‘일반 공개’ 여부다.
기업 간 첨단기술 쟁탈전이 심해지면서 각국은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1996년 제정된 ‘경제스파이법’의 벌칙을 2012년 크게 강화했고, 2016년에는 영업비밀을 침해당하는 기업의 권리를 더 강화한 영업비밀보호법을 발효시켰다. 일본도 2015년 관련법을 개정해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처벌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자기 나라 첨단기업의 영업비밀을 정부부처가 나서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겠다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달 16∼18일에는 보고서 공개 여부를 둘러싸고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권익위원회 수원지방법원 등의 결정 절차가 잇따라 예정돼 있다. 우리가 5년 뒤, 10년 뒤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국가기관이 한 곳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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