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반도체 슈퍼사이클(호황기)에 취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지난해 판 반도체만 104조 원어치, 시장점유율로 치면 20%가 넘는 액수다. 삼성전자는 25년 만에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 1위를 차지했고, SK하이닉스도 전례 없는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승리가 주는 쾌감에 취한 것은 반도체 업계를 담당하는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주 국내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로부터 “그런데 한국 반도체는 누가 그렇게 사 가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라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반도체를 사 가는 ‘큰손’ 중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뿐”이라며 걱정했다. 정보(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반도체를 사간다는 것은 그만큼 고객 데이터를 쌓고 있거나,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특정 기기를 많이 팔고 있다는 뜻이다.
반도체 고객사별 매출 정보를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입을 통해 미뤄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서버용 메모리반도체 시장 큰손은 아마존과 구글, 페이스북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쇼핑과 검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플랫폼 선점자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매년 수십억 달러를 들여 세계 각국에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다. 이 고객 데이터가 기업에 엄청난 가치를 가져다준다.
모바일용 메모리반도체는 중국 기업이 전체 물량의 절반을 쓸어간다. 중국 모바일 산업 초기 성장을 이끈 1세대 기업 화웨이와 샤오미, 이들의 뒤를 잇는 2세대 기업 오포(OPPO), 비보(VIVO) 등이 50%가량을 사간다. 이들 중국 기업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한국 기업을 밀어내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메모리반도체 슈퍼사이클은 두 번 정도 찾아왔다. 첫 번째는 PC, 두 번째는 모바일 시대의 태동기와 맞물렸다. 이번 슈퍼사이클은 특정 기기가 아닌 ‘4차 산업혁명’이 이끌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사물인터넷(IoT), 머신러닝 등 각각 미래 산업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한국 정부나 기업이 다 한 번쯤 미래 신성장 사업으로 거론했던 단어들인데, 정작 반도체 사 가는 곳은 미국과 중국 기업들뿐이다.
반도체 시장을 두고 ‘All or Nothing’,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대표적인 시장이라고 한다. 미래 신산업도 승자 독식 구조가 될 가능성이 크다. 현금이 차고 넘쳐도 기술(혹은 데이터)로 생존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은 업체를 따라잡기 어렵다. 개별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닌 기업 생태계 간에 경쟁이 벌어지는 이른바 ‘플랫폼 경쟁’ 국면이 이미 시작돼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1∼3월) 약 11조 원의 반도체를 팔았다. SK하이닉스도 호실적이 예상된다. 다시 한번 박수쳐줄 일이지만 승리의 기쁨에서 이제는 모두가 깨어나야 할 때다. 반도체만 팔다가 4차 산업혁명 속 새로운 기회를 모두 남에게 뺏길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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