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벚꽃 시즌이다. 연이어 최고 기온이 20도가 넘으면서 때아닌 이른 개화를 맞았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예정되어 있던 벚꽃 관련 행사 일정을 앞당기는 등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봄 손님맞이에 애를 먹고 있다. 마음이 급하기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아직 나들이 일정도 채 잡지 못했는데 행여 져버릴세라 너도나도 분주히 집을 나선다.
요 며칠 점심을 먹고 카페로 들어가는 대신 캔커피를 사 들고 회사 앞 벚꽃 길을 걸었다. 곧 비 소식이 있다고 하니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오늘도 연신 사진을 찍으며 ‘아 좋다’를 연발하고 있는데 저 멀리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다가왔다. 수업이 일찍 끝난 것인지 점심 탈출을 감행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들 역시 ‘아 좋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른 벚꽃이 이들에게는 행운이겠구나 싶었다.
학생 시절 때맞춰 피는 벚꽃은 늘 야속한 존재였다. 벚꽃이 피었다는 것은 중간고사가 다가온다는 징표였고, 채용 시즌이라는 엄포였다. 온전히 꽃구경만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할애하는 벚꽃 ‘놀이’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화려하게 핀 꽃을 즐기는 것이 내겐 허락되지 않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돌아보니 안쓰럽고,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괜찮아’ 말해주고 싶지만 그땐 그랬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봄을 시험지와 자기소개서와 씨름하며, 벚꽃을 외면하며 났다. 수험생 시절을 버티고 취준생 시절을 견디어 흔하지만 간절했던 직장인이 되었다. 합격만 시켜주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던 그 옛날의 취준생은 기억에서 지워낸 지 오래이다. 나이만 먹고 역할만 늘었지 크게 나아지지 못한 내공으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가끔 버겁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러하듯 진로, 적성 고민조차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최소한 꽃구경할 정도의 여백은 생겼다는 것이다. 똑같이 5분을 눈에 담더라도, 종전의 죄책감과 조급함 대신 황홀함과 충만함으로 온전히 그 시간을 물들일 수 있다. 25년 치의 봄을 눈에 담으려면 마음이 참 바쁘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는 계절의 황홀함을 즐기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관광객들의 상기된 표정이 다른 세상의 일 같고, 달뜬 꽃내음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는 시기의 이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게도 다시 그런 계절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악하지만 진심이 담긴 고3 때 쓴 시를 그들과, 훗날의 나와 함께 나누고 싶다.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밤 공기가 차다/길게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들 사이로/갓 피어난 벚꽃들 하늘과 맞닿아 하얀 눈물로 엉기어 있다//…//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봄, 이 봄/고개를 들자 쥐똥나무야/벚꽃의 화려함에 기죽지 말자/잔인한 이 계절 한껏 앓고 나면/그 가을 앙상한 뼈만 남은 벚꽃나무 아래 너는/보석보다 찬란한 열매를 맺게 되리라//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봄/2007년 이 봄’ ―‘고 3, 그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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