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의 뫔길]‘사과의 최고수’ 교황에게 배워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9일 03시 00분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저승사자’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셀프 후원’과 외유성 해외출장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해석이 나오자 버티던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은 마침내 돌을 던졌습니다. 2일 취임 이후 16일 사의 표명까지 저승사자의 보름천하입니다.

그는 문제가 터지자 사과보다는 “사실과 다르다” “국민 눈높이에 맞추지 못해 죄송하지만 불법은 아니다”는 주장을 줄곧 펼쳤습니다. 청와대는 ‘너희는 깨끗하냐’는 식의 관행과 반(反)개혁세력의 음모론까지 흘리며 선관위에 공을 넘겼습니다. 결국 선관위 판단에 따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대로 17일 그의 사표가 수리됐습니다.

정서적으로 더 큰 파장과 함께 글로벌 뉴스로 부각된 것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의혹입니다. 조 전무는 이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16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어리석고 경솔한 행동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 당시 사과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관련 제보들이 이어지고 대한항공의 국적기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청원까지 등장했습니다.

2016년 국내 출간된 ‘공개 사과의 기술’은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의 반쪽짜리 사과, 진정성 없는 ‘유감 사과’와 맞물려 화제가 됐던 책이죠. 미국 서던오리건대 교수인 저자 에드윈 L 바티스텔라는 언어학자로 언어학에 사회, 심리, 문화적 배경 등을 종합해 설득력 있는 사과론을 펼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제대로 된 사과의 핵심은 진정성과 이를 담아내는 과정입니다. △사과하는 이의 미안한 감정을 전달 △특정한 규칙 위반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비판을 수용할 것 △잘못된 행위의 명시적 인정과 자책을 분명하게 표시 △앞으로 바른 행동을 하겠다고 약속 △일정한 보상 혹은 대안 제시 등이 포함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과하기 어려운 인물일지 모릅니다. 오랜 논쟁 끝에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황이 신앙 및 도덕에 관하여 내린 정식 결정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류성(無謬性)을 인정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역사 속에서 가장 자주 고개를 숙이는 교황임이 분명합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발언이라 무류성까지 꺼낼 필요는 없겠지만 칠레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추문과 관련한 사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교황은 올해 1월 칠레를 방문했을 때 성추행 은폐 의혹을 받는 바로스 주교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당시 교황은 “증거를 갖고 오면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라며 “단 하나의 증거도 없고 모든 것이 중상모략”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비판이 일자 귀국 비행기에서 “학대받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한다”라며 “그들을 아프게 한 것에 용서를 구한다”고 일차적으로 사과했습니다. 2월에는 교황청 고위관리를 칠레로 보내 성추행 은폐 의혹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지만 최근 발표된 교황의 추가 사과는 훨씬 강도가 셉니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교황은 공개편지를 통해 “진실하고 균형 잡힌 정보가 부족해 상황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데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사과에서는 교황이 ‘사과의 최고수’임을 보여주는 특징들이 드러납니다. 물론 그가 전략적인 셈법 속에 사과의 테크닉을 쓰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첫째, 말과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진정성입니다. 교황은 이 서한에서 “영혼의 상처를 용기 있게 견뎌내며 피해를 증언해준 64명에게 감사한다”, “2300여 쪽에 달하는 조사단 서류를 읽으며 나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64명, 2300여 쪽 등 구체적 숫자와 함께 “수 주 내로 그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청하고 싶다”는 언급이야말로 공감할 수 있는 사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둘째, 빠른 타이밍입니다. 1월 논란과 사과, 2월 조사에 이번 사과까지 바티칸의 오랜 수치로 여겨져 온 아동 성추행이란 이슈의 파장을 감안할 때 빠른 타이밍이라는 게 교계의 반응입니다. 교황은 빠른 사과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지 않다는 확고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기와 진정성 모두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세상의 예측을 뛰어넘는 파격입니다. 교황들이 잘 쓰지 않는다는 오류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렇습니다.

반쪽 아닌 ‘온전한 사과’의 핵심은 진정성과 과정에 있습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또는 지지율이 높을수록 사과에 인색하다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프란치스코 교황#김기식 금융감독원장#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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