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조은아]실리콘밸리 떠도는 ‘어글리 대마불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0일 03시 00분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만우절인 1일 트위터에 올린 자신의 사진. 시중의 파산설을 비웃듯 ‘bankrupt(파산)’의 오기로 보이는 ‘bankwupt’를 적은 종이 박스를 덮은 채 차에 기대 있다. 사진 출처 일론 머스크 트위터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만우절인 1일 트위터에 올린 자신의 사진. 시중의 파산설을 비웃듯 ‘bankrupt(파산)’의 오기로 보이는 ‘bankwupt’를 적은 종이 박스를 덮은 채 차에 기대 있다. 사진 출처 일론 머스크 트위터

조은아 국제부 기자
조은아 국제부 기자
‘too big to fail(대마불사·大馬不死).’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월가를 유령처럼 지배했던 이 표현은 요즘 미 대륙 반대편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흘러나온다.

10년 전 도산설에 휩싸였던 월가 대형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은 “우리처럼 큰 회사는 망하지 않는다”며 자신 있게 떵떵거렸다. 그러다 결국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되자 투자자에게 거짓말한 ‘피노키오 CEO’란 비난을 받았다. 투자자들에게 괘씸한 경영인들이었지만 일부 금융기업들은 정부로부터 혈세를 수혈받아 버틸 수 있었다. 대형 금융사들이 도산하면 미국 경제가 입을 타격이 워낙 크니 정부로서도 도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10년 전 월가의 데자뷔를 느낀다면 지나친 착각일까. 영국 시사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3일 “테슬라가 자금 부족 사태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하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이 기사에 트위터로 댓글을 달았다. “이코노미스트는 원래 지루하지만 무미건조한 위트를 영리하게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지루하기만 하다. 테슬라는 수익을 잘 낼 거라서 3, 4분기에 돈을 모을 필요조차 없다.”

머스크는 큰소리를 쳤지만 투자자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머스크는 지난해 말까지 ‘모델3’를 주당 5000대씩 생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차질이 생겨 출고 일정을 올해만 2차례나 연기했다. 게다가 또 생산 연기가 예고되고 있다. 애덤 조너스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는 18일 “모델3의 주당 5000대 생산이 올해 달성되기 힘들다”며 “테슬라는 시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숙이 ‘대마불사’의 영역에 진입했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테슬라가 미국에서 워낙 일자리를 많이 창출해 만약 파산 위기에 내몰리면 대량 실업을 우려한 미국 정부가 혈세로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최근 정보 유출 사고로 주가가 급락한 페이스북도 ‘대마불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광고나 영업을 의존하는 기업과 페이스북에 익숙해져 버린 이용자들이 많아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망할 수 없다는 의미다. 위기 속 페이스북은 월가 대형은행들처럼 정부에 자금을 요청하는 대신 “우리를 내버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정보 유출 방지를 위한 고강도 규제가 예고되자 파장을 고려해 신중하게 적용해 달라는 호소다.

크리스틴 엠바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가 10일 미 의회 청문회에서 자기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시스템적으로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페이스북은 대마불사 자리를 꿰차려는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우리를 건들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규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해석이다.

투자자들은 자신의 경영 실책이나 실패를 책임지지 않고 국민의 혈세로 땜질해 생존하는 ‘어글리 대마불사’가 실리콘밸리에서도 재연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머스크, 저커버그 같은 ‘스타 CEO’들이 기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종합적으로 점검해봐야 하는 이유다. 스타 CEO들이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과감한 추진력으로 성공 신화를 써온 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위기 속에서도 스타 CEO의 인기는 쉽사리 식질 않는다. 하지만 최근 이들도 경영 실책을 반복하며 ‘CEO 리스크’가 불거졌다. CEO 얼굴이 곧 기업의 브랜드인 페이스북과 테슬라는 창업주의 발언 한마디, 실적 하나에 휘청거리고 있다. 이러다 보니 미 CNBC는 “테슬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최대의 위협은 머스크 자신”이라며 머스크에겐 굴욕적인 전망까지 내놨다.

미국 언론들은 10년 전 대마불사에 혈세를 낭비한 아픔을 떠올린 듯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뼈아픈 충고를 전한다. 머스크에게는 오판이나 독단을 방지하도록 “홀로 판단하지 말고 팀과 함께 일하라”고 조언한다. 페이스북 투자자들은 “저커버그와 견제와 균형을 이룰 독립된 회장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업이 특정한 경영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일찍이 전문성과 리더십 있는 후계자를 물색하고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승계 계획을 세밀하게 세우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오너 일가의 어이없는 ‘갑질’과 일탈 때문에 CEO 리스크가 급등한 일부 한국 대기업도 새겨들을 만한 조언이다.
 
조은아 국제부 기자 achim@donga.com
#실리콘밸리#월가#테슬라#일론 머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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