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눈이 우리를 세계로 안내한 최초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하멜 표류기’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헨드릭 하멜은 일행 36명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대만을 거쳐 일본 오키나와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했다. 하멜은 표류 직후부터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조선의 정치, 경제, 외교뿐 아니라 모든 생활문화까지 섭렵해 이를 상세히 기술했다. 우리 문화에 생소한 서양인의 시선으로 날짜와 시간, 지명까지 상세히 기록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멜이 힘겹게 조류와 바람에 기대 세상을 만났다면 이제 세상은 만인에게 열려 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만의 ‘하멜’들이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있다. 나침반 대신 스마트폰으로 자신들의 관심사인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영화, 음식, 음악 그리고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 모르는 세계의 것들을 받아들인다. 어떤 경계도 없는 ‘무한 넘나듦’의 세상이다.
이런 현상이 패션 생태계도 크게 바꿔 놨다. 전 세계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은 앞다투어 생소한 문화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펜디는 중국 만리장성에서 패션쇼를 펼쳤고, 샤넬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린리스고 궁전에서, 그리고 루이뷔통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기념해 리우의 니테로이 현대미술관에서 컬렉션을 진행했다. 이는 현지 문화와 친구가 돼 타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2015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한복을 모티브로 한 ‘샤넬 인 서울’ 컬렉션이 열렸다. 세계적인 브랜드가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컬렉션을 진행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유명 해외 브랜드나 디자이너들이 중국과 일본에만 추파를 던지는 것을 늘 아쉽게 생각했는데, 이제 그들의 ‘고고한’ 눈이 한국을 본 것 자체가 새로운 흐름이라 생각한다.
한국 패션이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의 우리 문화 체험이 꼭 필요하다. 또 우리 스스로 세계인이 인정할 수 있는 가치와 미(美)를 찾아야 한다. 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이 입고 체험해 봐야 한다. 요즘 TV에서는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프로와 한국 연예인들의 룸메이트가 돼 생활하는 프로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의 예상치 못한 좌충우돌 체험기가 큰 웃음을 주고 어떤 면에서는 ‘사람 사는 거 따 똑같네’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패션은 크게는 건축물, 작게는 도자기나 가구와 달리 세대를 이어 보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물건으로 대대손손 전해지기보다 끊임없이 ‘입혀져야’ 그 문화적 가치를 이어나갈 수 있다. 전 세계인이 케이팝을 듣고 신나하며 즐기는 것 자체가 문화이며 한식당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문화이다.
이런 일련의 창조활동은 문화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며 그 창조활동이 인정받으면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문화의 순환 고리일 것이다. 예전 하멜은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머물며 체험을 했지만, 21세기의 하멜들은 일부러 한국을 찾아와 체험을 한다. 따라서 21세기 하멜 체험기는 기존에 있는 것을 다시 ‘만듦(make)’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창조(create)’하는 패션의 새로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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