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맞대고 기다랗게 3열 횡대로 정렬한 보병이 북소리에 맞춰 전진한다. 간간이 포탄이 작렬하지만, 병사들은 발로 땅을 두드리며 굳건하게 전진한다. 17세기 전열 보병 전성기의 전투 장면이다. 언덕 위에서 말을 타고 이 용감한 병사들의 행진을 지켜보는 장군의 심정은 뿌듯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플레이트 메일(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뿌듯한 감동 대신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누가 농민들이 저렇게 싸우게 만들었어.”
중세의 기사는 꽤 값비싼 존재였다. 기사 한 명이 무장을 갖추는 데 필요한 비용은 소 50마리 가격을 상회했다. 그러니 작은 영지 하나에서 기사 한 명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농민들에게 장창 한 자루씩만 쥐여주고 잘만 조련하면 이 값비싼 기사를 가볍게 말에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고대 전쟁에서 증명된 사실이었다. 기사들이 정말로 잊어버렸던 것인지, 가슴속에 두려움을 품고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은 평민 보병이 기사를 말에서 두들겨 떨어뜨리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다시 17세기로 돌아오면 포탄을 뚫고 전진하는 전열 보병을 보면서 새로운 두려움을 느끼는 장군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참모였던 앙투안앙리 조미니는 저 대포가 더 발전하면 보병 대형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대포의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한 로봇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위한 의지는 존경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찾아오는 백발을 몽치로 막을 수 없듯이, 이미 개발된 기술이 반대한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인류가 만든 모든 기술은 다 양면성이 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능력은 그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합리적 지성과 건전한 사회구조가 아닐까. 인류의 기술이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게 커진 만큼, 인류의 지성도 그런 자격을 갖추려는 노력이 더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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