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은 확실히 생물이다. 생태계 최강자라도 낡은 트렌드에 묶이면 활력을 잃고 몰락한다. 휴대전화 절대강자 노키아가 그랬고, 전자업계의 공룡 소니도 그랬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조직도 변해야 산다. 부활한 노키아와 소니가 이 점 역시 증명한다.
스포츠는 이런 흐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스몰볼로 리그를 호령했다가 쇠락한 뒤, 올해 홈런군단으로 변신한 프로야구 SK의 사례를 보자.
SK는 10년 전만 해도 천하무적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지휘로 2007년부터 4년간 우승 3번, 준우승 1번을 기록했다. 비결은 스몰볼이었다. 빠른 발과 번트로 득점을 하고, 벌떼 마운드로 실점을 막는 ‘한 점 승부’의 달인이었다. 김 감독의 색깔에 최적화된 SK는 적수가 없었다.
2011년 김 감독이 물러나면서 SK는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리더십의 변화도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프로야구의 트렌드가 변하고 있었다. 타자의 기세가 투수를 압도하는 ‘타고투저’ 현상이 심화되면서, 한두 점 더 뽑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대량 득점을 위한 공격적인 빅볼이 부상한 이유였다. SK는 어정쩡한 스몰볼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2013년부터 5년 연속 4강 밖으로 밀렸다.
맥없던 SK가 달라졌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압도적인 수치로 팀 홈런 1위. 두산과 선두 싸움을 하고 있다. 홈런군단이라는 이미지는 흥행도 보증한다. SK 관중은 작년보다 70% 이상 늘었다. 리그 전체 관중은 2% 줄었는데도 말이다.
SK는 3, 4년 전 팀을 새롭게 설계했다. 감독이 아닌, 안방구장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에 최적화된 전력을 구축하겠다고 방향을 잡았다. SK 안방구장은 홈런 친화적인 구장이다. 좌우 담장까지 거리가 짧고, 담장 높이도 낮은 편이었다. 바람의 영향 등도 있어서 어중간한 타구도 담장을 넘어갔다. SK는 ‘홈런’을 반전의 승부수로 선택했다.
땅볼 유도형 투수를 중용해 상대 타선의 홈런을 봉쇄하고, 반대로 자신들은 장타자 위주로 타선을 구성해 홈런을 늘리면 될 일이다. 그런데 투수 자원은 트레이드 시장에서 확보가 쉽지 않다. 좋은 선수도 많지 않고, 좋은 선수는 상대팀에서 내주지 않는다. 타자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당연히 장타자 영입·육성이 키워드가 됐다.
LG에서 존재감 없던 만년 유망주 정의윤과 힘 좋은 최승준을 영입했다. 신인 지명 때도 거포 김동엽을 고민 없이 선택했다. 지난해에는 외국인 선수 교체 때 타율은 낮지만, 장타력은 대단한 로맥을 선택했다. 이런 공갈포 스타일은, 과거엔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것이다. 지금 SK의 핵심 타자들이다.
거포 육성을 위해 미국 메이저리그를 강타한 ‘플라이볼(뜬공) 혁명’도 적극 도입했다. 플라이볼 혁명은 ‘타구의 각도가 30도 정도일 때 장타가 많이 나온다’는 발사각도 이론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퍼 올리는 스윙으로 공을 의도적으로 띄우는 게 핵심이다. 모험일 수도 있었지만, SK 타자들은 첨단 장비가 추출한 세밀한 데이터로 훈련하며 홈런 역량을 키웠다.
SK가 올해 가을잔치에서 우승하면 ‘홈런 야구’는 리그 전체로 확산돼 트렌드가 될 것이다. 벌써 KT도 합류한 분위기다. 그러나 몇 년 이후엔 또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또 다른 강자가 등장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전 영역에 걸쳐 흥망성쇠의 속도가 빠르다. 변화의 흐름을 읽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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