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6일 D데이 0시. 미 육군 82공정사단 존 스틸 일병의 중대는 프랑스 서부 생트메르에글리즈에 낙하했다. 폭격으로 마을에 화재가 발생해 대낮처럼 밝았고, 광장에는 주민과 독일군이 모여 있었다. 미군은 공중에서 사살되거나 불타는 집에 추락해 탄약과 함께 폭사했다. 스틸 일병은 교회 종탑에 낙하산이 걸렸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는 이날 밤의 비극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1962년)에도 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과 생김새가 비슷한 배우에게 배역을 맡겼고 생존 인물이 직접 자신의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사실성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스틸 역은 액션배우가 아니라 코미디언인 레드 버튼스가 맡아 약간 어수룩한 모습으로 연기했다. 스틸은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것을 보고 화가 났을 것이다. 스틸은 할리우드 액션스타를 빼닮은 용모에 체격도 건장한 병사였다.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그는 미군이 최초로 투입된 북아프리카 전투에 참가했고, 시칠리아에서도 낙하했다. 종탑에 걸렸던 그날도 독일군에게 생포됐다가 바로 탈출했고 아른험 공수작전과 베를린 강하작전에도 참가했다. 제대 후에는 변호사가 돼 인생 후반부도 영예롭게 살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아니라 스틸의 일생을 다룬 영화였다면 감독은 전혀 다른 배우를 섭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종탑에 매달려 죽은 척하는 낙하산병이었다. 존 웨인이나 실베스터 스탤론이 종탑에 걸려 버둥거렸다면 관객은 분노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고 싶어 한다. 아니, 이미지에 취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이미지 정치가 통한다. TV 출연 한 번으로 단박에 스타가 되고 나중에 실망이 반복되는 사태는 관객인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배우는 허구의 세계에서 활약하지만 정치인의 활동무대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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