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사이도 아니고, 성인 남자 형제끼리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형이 동생한테 쓴 것만 660통이 넘는다. 그 비범한 일을 해내 미술사를 장식한 형제가 있었으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다. 테오는 고흐의 후원자이자 화상이기도 했다.
1890년 5월 3일, 테오는 며칠 전 형이 보낸 그림들을 본 후 이렇게 편지를 썼다. “… 아마도 지금까지 형이 해낸 최고의 작품일 것 같아. … 형이 인물 회화로 전환한 날이라고 믿게 돼. 엄청난 소식을 기대하고 있을게.”
테오가 최고의 작품이라며 감탄과 기대를 쏟아낸 그림이 바로 ‘첫걸음’이다. 그림 속에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아빠를 향해 한 발짝씩 내디디려 하고, 엄마는 아이가 넘어질까 봐 두 손으로 잡아주고 있다. 이를 본 아빠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손을 뻗어 아이를 반기고 있다. 행복한 가족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그림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고흐가 우울증으로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 그린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고흐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같은 제목의 밀레 그림을 모방한 것이다. 고흐는 테오가 보내준 밀레 작품의 흑백사진을 보고 따라 그린 후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고흐 식’ 채색을 했다. 1889년과 1890년 사이 병원에 있는 동안 고흐는 총 스물한 점의 밀레 모작을 완성했고, 그중 몇 점을 당시 파리의 화상이던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특히 이 그림은 두 형제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림을 그릴 당시 테오의 부인 요하나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곧 태어날 조카의 귀여운 모습을 상상하면서 밀레의 ‘첫걸음’을 따라 그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카의 첫걸음마를 보지 못하고 6개월 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에서처럼 일상의 작은 행복을 만끽하는 가족의 모습은 생전의 고흐가 그토록 갈망했던,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한 가장 큰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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