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3-6번지. ‘hp’라는 간판이 크게 걸린 원통형 유리건물은 오랜 시간 여의도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다. 눈에 띄는 위치도 위치지만 건물에 얽힌 사연도 깊어서다.
고려증권 본사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형 월가(월스트리트)’를 상징했다. 외환위기 탓에 고려증권이 부도가 나자 이 건물을 미국 HP가 헐값에 사갔다. 당시 외환위기로 국내 기업이 잇따라 쓰러지고, 헐값에 나온 부동산을 외국 자본이 쓸어간다는 소식이 매일같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HP도 그 외국 자본 중 하나였다.
그런데 20년 동안 그 자리에 있던 ‘hp’ 간판이 지난달 사라졌다. 그 대신 그 자리를 ‘wework(위워크)’라는 간판이 차지했다. 위워크는 이제 막 창업 8년 차에 불과한 신생 기업. 건물 몇 개 층을 장기 임차, 리모델링해 개인이나 기업에 돈을 받고 빌려주는 미국 기업이다. 여의도 직장인들 사이에서 “도대체 위워크가 어떤 회사이기에 HP의 자리를 차지했냐”는 말이 나돌았다.
위워크가 한국에 진출한 지 불과 2년째인데 기세가 무섭다. 서울 랜드마크마다 간판을 내걸었다. 서울역 맞은편 서울스퀘어 건물 간판도 이달 ‘SEOUL SQUARE’에서 ‘wework’로 바뀌었다. 종각역 사거리 종로타워에도 9월 위워크가 입주한다. 이 빌딩 최고층은 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다. 유명 레스토랑이 있던 이 빌딩 최고층도 위워크 공간이 된다.
올해 1분기(1∼3월) 서울지역 오피스 평균 공실률이 15%가 넘는다는데 ‘사무 공간’을 공유하는 위워크는 지점을 내기가 무섭게 서로 입주한다고 난리다. 강남, 광화문 등에도 위워크 지점이 있다. 비결이 무엇일까.
위워크의 가치는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나온다. 표면적으로는 사무공간 임대 업체지만 속을 살펴보면 입주 기업 혹은 개인이 역량을 극대화할 장(場)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21개국, 71개 도시, 총 242개 지점 입주자들은 언제든 자유롭게 교류가 가능하다. 위워크 앱(애플리케이션)으로 입주사 직원 누구와도 연락할 수 있고, 필요한 엔지니어 디자이너 등도 이곳에서 구할 수 있다. 위워크 곳곳에는 주·월별 크고 작은 이벤트가 공지된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다소 딱딱했던 기업문화가 위워크 입주 뒤 변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위워크의 부상은 우버, 에어비앤비의 성공과 같은 이유로 풀이할 수 있다. HP 같은 첨단 기술 제조업들이 차지했던 주인공 자리를 네트워크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플랫폼 기업이 대체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시대 태동기를 이끌었던 컴퓨터 제조기업 HP의 간판이 창업 8년 차 신생 기업 간판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세계 산업 지도가 새로 그려지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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