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측이 대법원에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파면하라’는 국민청원을 전달해 물의를 빚고 있다. 정 부장판사는 2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에서 핵심 혐의를 무죄로 판단해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한 바 있다. 선고 직후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정 부장판사를 특별감사하고 파면하라는 국민청원이 빗발쳐 모두 26만여 명이 참여했다.
청와대는 20만 명 이상이 추천한 청원에는 답을 하도록 정한 내규에 따라 2월 말 “삼권분립에 따라 현직 법관의 인사와 징계에 관련된 문제는 청와대가 관여할 수 없으며, 관여해서도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정혜승 뉴미디어비서관이 법원행정처에 전화를 걸어 청원 내용을 전달하면서 평지풍파를 자초했다. 정 비서관은 국민청원 내용만 법원행정처에 단순히 전달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대법원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무슨 의도로 국민청원 내용을 전달했는지 모르지만, 조처를 할 의무가 없고 조처를 할 계획도 없다”면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고 한다.
판결을 문제 삼아 법관 파면을 요구하는 것은 법관의 신분 보장을 규정한 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정 법관에 대한 불신이나 편견을 담은 청원이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를 통해 전달되면 결국 사법부의 독립을 흔들고 법관이 여론 재판을 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법관들이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서 사법권 침해를 우려한 것도 당연하다.
정 비서관은 법원에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해 문서가 아닌 전화로 전달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꺼림칙하게 여긴 ‘법관 파면’ 청원 전달이 문제가 될 줄 몰랐다면 자격 미달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삼권 분립과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대한변협은 어제 성명을 내 “법원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국민청원이나 인터넷 소통 등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하는 현 정부에선 이런 일이 빈발할 소지가 있다. 대법원도 손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청와대 측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이참에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투는 것과 같이 청와대가 관여해선 안 될 사안에 대한 청원은 아예 받지 말거나 아니면 해당 기관 통보라도 자제해야 한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 당시 우병우 조윤선 피고인 영장을 기각했던 판사 등에 대한 청원들이 지금도 청와대에 제기돼 있다. 청와대는 “수권자인 국민은 사법부도 비판할 수 있다”며 판결에 대한 청원을 계속 받을 태세다. 그러나 월권 논란을 피하고 청원의 원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스템을 고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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