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중심가인 화이트홀에는 곳곳에 유명한 장군, 부대의 동상과 기념비가 서 있다. 그중 왕립기갑연대도 있는데, 여기에는 세계 최초의 탱크부대라는 명문과 세계 최초의 탱크였던 ‘마크 1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철갑으로 무장하고 무한궤도로 구동되는 마크 1호는 57mm 곡사포와 기관총 2문을 탑재했다. 무게는 28.5t이었다. 엔진을 개발하지 못해 런던의 상징인 이층버스 엔진을 얹었다. 지금 보면 오히려 미래형 탱크처럼 보이는 마크 1호는 1916년 9월 15일 솜 전투에 처음 투입됐다. 그러나 시속 6km의 저속, 낮은 엔진 파워, 약한 장갑으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솜의 진창, 참호, 구덩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장 나 주저앉았다.
처참한 실패였지만 참전국들은 이 철갑의 괴물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영국은 마크 1호의 개량형을 쏟아 냈고, 프랑스와 독일도 즉시 탱크 개발을 시작했다. 이 경쟁에서 승자는 프랑스의 르노였다. 독일은 마크 1호와 비슷한, 그러나 마치 버스에 철판을 댄 듯한 모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프랑스는 완벽하게 새로운 탱크를 만들었는데 회전포탑을 장착한, 우리에게 익숙한 탱크를 최초로 개발했다.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가면 르노 탱크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그러나 오늘날 탱크 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 축구팀은 늘 전차군단이라고 불린다. 어쩌다 프랑스가 탱크의 명성을 상실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 후 탱크의 발전 방향과 기갑전술의 방향을 잘못 잡았던 탓이었다. 대전 후 독일 장교들은 탱크의 기동성에 주목한 반면, 프랑스는 장갑에 우선을 두었다. 1차대전 당시 탱크 디자인을 보면 속도도 제일 빨랐고, 기동성의 가능성을 보여준 건 르노 탱크였는데도 말이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이 그것의 미래적 활용도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술, 문화, 사회,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해주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인문학이 현학, 도덕적 교훈, 심지어 프레임 씌우기로 사용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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