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의 뫔길]김수환 추기경의 NO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0일 03시 00분


2007년 복원된 금강산 신계사의 낙성 법회. 동아일보DB
2007년 복원된 금강산 신계사의 낙성 법회. 동아일보DB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4·27 판문점 회담 이후 남북 관계는 봄기운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 ‘봄이 온다’에 이어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의 결실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가을이 왔다’는 공연을 열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제안이 있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스포츠와 문화 교류는 봄에서 교류의 기운이 왕성한 여름, 다시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는 가을로의 전환을 재촉하는 촉매이기도 합니다. 이들 분야는 대북제재 위반 여부에 대한 논란을 피해 갈 수 있고 반대급부를 둘러싼 갈등도 비교적 적은 영역이라 이행이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그 상징적 효과는 매우 크죠. 올 2월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남북선수단 공동 입장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현지의 칼바람을 누그러뜨린 봄의 조짐이었습니다.

문화 영역에서는 겨레말큰사전 공동 편찬과 개성 만월대 공동 발굴조사, 언론과 종교계의 교류 등이 곧바로 실행 모드에 들어갈 수 있는 사안으로 꼽힙니다. 특히 남측의 종교인들은 그동안 퍼주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교류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북한의 핵 도발로 남북 관계의 계절 시계는 봄에서 엄동설한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 봄볕을 살려 결실을 본 것이 2007년 금강산 신계사(조계종)와 2005년 개성 영통사(천태종) 복원입니다. 영통사 복원에는 46만 장의 기와와 단청재료 3000세트가 들어갔고, 29채의 전각이 세워졌으며, 묘목 1만여 그루가 심어졌습니다.

종교계의 경우 남측 희망사항이 많아 이전보다 활발한 교류가 예상되지만 성과 위주의 접근은 금물이고 지켜야 할 선(線)이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조계종에서 남북 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원택 스님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복원한 지 10년이 넘은 신계사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죠. 다양한 교류를 위해 연락하고 있는데 아직 공개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원택 스님은 뜻밖에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말을 빌려 남북 교류의 원칙을 언급했습니다. 김 추기경이 생전에 방북 신청을 하고, 오랫동안 북한 방문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김 추기경이 1998년 은퇴하면서 물러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합니다.

2000년대 초반 강연에서 들은 김 추기경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는 게 스님의 말입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제가 돈 내고 북한 간다면 이게 선례가 되지 않겠느냐. 향후 남북 교류가 계속될 것인데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없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나”라고 말씀했다네요. 원택 스님과 평양교구장 고문으로 대북 지원 활동을 벌여온 함제도 신부(미국명 제라드 E 해먼드)의 말을 종합하면 이 돈은 7만∼10만 달러로 추정됩니다.

우리 종교계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현안은 다양합니다. 불교만 해도 여러 종단이 북한 지역 사찰의 복원과 사찰 내 문화재의 공동 조사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2015년 북한의 장충성당을 복원하고 남측에서 사제를 파견해 미사를 봉헌하는 방안 등을 합의했지만 이행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비롯해 여러 단체가 북한과의 교류와 지원 사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개신교계 원로인 홍정길 목사는 25년간 남북나눔운동 이사장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북 교류의 5계명’으로 △북에서 한 일, 남에서 떠들지 말라 △주는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원하는 것으로 도우라 △단, 현금이 아닌 물건으로 도우라 △술을 조심하라 등을 꼽았습니다.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뿐 아니라 대북 교류에 나서는 책임자들이 ‘남북 화해와 평화의 교량 공사’에서 마지막 테이프 커팅의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아니라 다리 밑 기둥과 자갈이 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고언도 이어졌습니다.

종교인들은 북한의 특수성을 감안해 교류·지원과 선교·포교의 선도 지켜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르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1897∼1944)의 손자인 주승중 목사(인천 주안장로교회)의 말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는 조부 묘소와 교회 등 그 흔적이 누구보다 그리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부 목회자들이 해외에서처럼 북한 지역을 또 하나의 선교지로만 여긴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야흐로 남북 관계의 봄, 그러나 ‘추기경의 노(No)’에 담긴 의미도 잊지 말아야 할 시기입니다.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4·27 판문점 회담#북미 정상회담#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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