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씨 안녕하세요. 한국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거를 프랑스 말로 우에 하노? 아이고, 사돈을 만나마 무슨 말을 할꼬. 할 말은 태산 같은데….”
지난해 프랑스에서 시아버님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정어머니는 하고 싶은 말을 프랑스어 문장으로 빼곡하게 적었다. ‘금쪽같은 아들을 타국 멀리 보내놓고 얼매나 애가 타겠노. 얼매나 보고싶겠노….’ 이렇게 중얼거리며 나날이 외우고 익혔다.
“그럼 (프랑스) 알자스는 어떻게 하고? 이 집은 누가 가지고, 이 많은 가구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이 모든 것들은 너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것인데. 벼룩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는 말인가. 8월 벼룩시장 말이다.”
우리가 한국에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시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구와 그릇 핑계를 댔지만 사실 아버님은 알자스를 떠나 동양에 가서 살겠다고 하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알자스는 우리에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지로 알려진 곳으로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있는 지방이다.
알자스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풍광이 제일 아름답고, 음식이 제일 맛있고, 가장 살고 싶은 곳은 어디도 아닌 바로 알자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알자스는 프랑스에서 인구 유출이 가장 적은 지방 중의 하나이며 나의 시댁 식구들도 모두 그곳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막내아들만이 알자스를 떠나서, 그것도 멀고 먼 동양으로 가겠다니 아버님에게는 날벼락과 같았다. 우리가 한국으로 오는 날 아버님은 여기저기 아픈 곳을 나열하면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고 울적하고 시니컬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한국에 오세요. 가을 날씨가 제일 좋으니 그때 맞춰 오시면 되잖아요.”
이렇게 말했지만 아버님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라고, 비행기 안의 건조한 공기와 긴 비행시간이 두렵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도 가지 못할 것이고 바로 죽을 텐데 어떻게 가겠느냐고….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는 화를 내면서 알자스를 떠났다.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한국에 온 뒤 1년 만에 아버님이 아들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
“얘야,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구나. 지금 안 가면 절대 못 갈 것 같다. 너희들이 사는 나라니 아무리 멀어도 가봐야지.”
아버님은 간호사인 큰딸을 대동하고 가방 한가득 비상약을 챙겨서 한국으로 왔다. 친정으로 가는 길에 아버님은 친정어머니 ‘끔쑤’ 씨의 안부를 물었다. “끔쑤 아니고요, 금순이라니까요.”
끔쑤 씨는 아침부터 아파트 마당에 나와서 서성거리며 눈에 보이는 꽃들을 따서 한 묶음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에서 있었던 우리 결혼식(2003년)에 어머니가 왔고, 그때 처음으로 사돈 간의 만남이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아버님은 친정어머니와 춤을 추었는데 그것은 두고두고 어머니 인생의 핫한 이야깃거리였다.
“우리 사돈 레몽 씨는 춤을 어찌나 잘 추는지 내 손을 잡고 빙빙 돌리는데 선수더라 선수. 거기다 그쪽 사람들은 사돈끼리 맞절도 안 하고 끌어안고 볼때기다 뽀뽀를 하더라 아이가. 아이고 프랑스 사람들 참말로 쌍놈들이재.”
70세에 처음 만나 춤을 추었던 두 사람, 85세가 되어 다시 만났다. 아버님은 친정어머니 볼에 쪽쪽 소리 나게 뽀뽀를 했다. 어머니는 쪽지를 펴 커닝을 한 뒤 수줍게 말했다. “봉주르 머슈 레몽. 비엥버니 꼬레 쉐 무아….(레몽 씨 안녕하세요. 한국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그러고는 아파트 화단에서 갈취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백발의 노신사는 길쭉한 코를 한국의 잡초 꽃에 박으며 말했다.
“메르시 보쿠 끔쑤운….”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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