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에 달빛 쏟아지네/애기가 달님 안고 파도를 타네/애기가 별님 안고 물결을 타네.” 이것이 어떤 노래의 일부라면, 그것은 달빛과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바다를 노래하는 동요이거나, 적어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노래일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노랫말은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아 시간이여/아 생명이여 생명이여.” 동요에서는 “시간이여” “생명이여”라고 노래하지 않는다. 시간과 생명이라는 말이 관념에 속하는 것이어서 동요와는 어울리지 않는 탓이다.
‘가왕’ 조용필의 ‘생명’은 “저 바다 애타는 저 바다/노을 바다 숨 죽인 바다”라는 구절에서 시작되어 “아 생명이여 생명이여”라는 구절로 끝난다. 그렇다면 생명을 예찬하는 노래일까. 아니다. 오히려 생명을 애도하는 엘레지이고, 그의 말대로 하면 “광주의 학살에 대한 분노를 담은 곡”이다. 광주를 환기하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그렇다. 이것이 이 노래가 가진 비밀이다.
1982년에 발표한 조용필의 앨범 ‘못 찾겠다 꾀꼬리’에 수록된 ‘생명’의 노랫말은 방송 심의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 지시’를 받았다. 노래의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안 보이는 감정까지 검열하지는 못할 테니까, 노랫말에 담지 못하는 감정을 목소리와 몸짓에 담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노래를 들으면, 동화적인 요소는 오간 데 없고 슬픔과 절규와 분노의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는 짓밟힌 5월의 모든 생명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담아 애절하게 목소리로, 아니 온몸으로 절규했다.
‘생명’은 그렇게 태어난 노래였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그 “나름대로의 투쟁”이었다. 광주는 “체질적으로 정치와 거리가 멀다”는 그에게도, 광주를 ‘살아남은’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상처이자 분노였고 죄의식이었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였고 생명의 문제였다. “아 시간이여, 아 생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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