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휴학 당시 대학로 소극장에서 보조연출로 일했다. 딱히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단순한 동경과 호기심에서였다. 최고의 문화생활이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연극이던 시절이었다. 객석 뒤에서 조명과 음향을 만지면서 초반엔 사고도 참 많이 쳤다. 하지만 노력 끝에 100분짜리 공연의 대사 한 줄, 몸짓 하나까지 달달 외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연기에 눈이 갔다. 수십 번도 더 본 장면인데, 배우의 감정 몰입이 좋은 날엔 신기하게도 여지없이 눈물이 났다.
악을 쓰고 펑펑 눈물 흘리는 배우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부러웠다. 얼마나 개운할까. 그때였다, 언젠가 나도 한 번쯤 연기를 해보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크고 작은 일상에 치여 이런 치기 어린 바람은 기억 저편으로 잊혀져 갔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하루짜리 취미연기 클래스를 발견했고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그곳을 찾았다.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문 앞에 선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보통 사람 네 명이 모였다. 누군가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누군가는 부족한 감정 표현을 늘리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억눌러왔던 묵은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생면부지의 네 사람은 친구가 되어 울기도 하고, 직장 동료가 되어 화를 내기도 했다. 가상의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눈물이 나도록 웃기도 했다.
온전히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만 집중해 또 다른 내가 되어보는 시간. 연기란 말 그대로 ‘play’, 감정을 재료로 한 하나의 ‘놀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간 우리가 감정의 존재를 얼마나 등한시해 왔는지도. 비단 우리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감정 표현에 인색하고 항상 타인을 의식하며 긴장도가 높다. 한국 경제 규모는 작년 기준 세계 12위인 반면 행복지수는 57위, 자살률은 13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강사님 말씀과 같이 그 간극에서 놓친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벅찬 하루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란 대개 쉽지 않은 일이다.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미성숙의 상징이므로, 성숙한 사회인이라면 응당 감출 줄 알아야 했다. 표현할 경우 어김없이 ‘어리다’는 딱지가 나붙었다. 반면 감동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종종 ‘오그라드는’ 별종으로 치부되곤 했다. 어느 방향으로든 넘치지도, 그렇다고 아주 모자라지도 않는 감정 표현, 어른들은 그것을 ‘사회성’이라 불렀다. 이것이 행복의 반의어처럼 들리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공감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표현 없이는 공감도 없다. 어느 노래 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오그라든다는 말은 누가 만든 걸까.’ 가끔은 어려도 좋고, 오그라들어도 좋다. 조금 더 감정 표현에 관대해질 때 우리, 보다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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