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MBC 공채가 떴다. 서류전형 없이 지원자 모두 필기시험을 치르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시험장은 인산인해였다. 1교시 상식 시험이 끝나고 2교시 작문 시험 제시어가 공개됐다.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을 쓰시오.’ 여기서 비밀이란 사건이 아닌 ‘유일무이한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돈이 안 들면서도 효과가 좋은,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가지에 관해 썼다. 즐겁게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해 공유하려 한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할 것!
나를 내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은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게 이 세계의 예의다. 예의 바른 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이를 묻고, 족보 정리를 하지 않으면 대화를 시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깍듯하게 존대했다. 언니, 오빠라 부르며 고분고분 잘 따랐다. 나이가 어리면 자연스레 하대했다. 다섯 살이 네 살에게, 열다섯 살이 열네 살에게 그랬다. 가끔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집에 돌아오는 날엔 더욱 그랬다. 평생 서로 모르고 살다가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높은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한 걸까? 아무리 예의를 지킨다 해도 ‘언니’라 부르는 것과 ‘야’라 부르는 건 달랐다. 한쪽은 은근슬쩍 말을 놓아도 되고, 다른 한쪽은 허락을 받아야 했다. 동등한 호칭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족보 정리 병’이 낫게 된 건 더 이상 이게 예의가 아닌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성은 언니’ ‘성은 누나’가 아닌 ‘성은아’로 말이다. 기존에 아는 사이에선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관계 맺는 사람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대학 시절 경험한 ‘반말의 마법’도 한몫했다. 학번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아리에서 삼수생이었던 난 두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기였다. 동아리 규칙상 그들은 나를 ‘성은아’라고 불러야 했다. 이내 익숙해졌고, 우린 마법처럼 서로의 나이를 잊게 되었다. 틀린 걸 지적하는 게 버릇없는 일이 아니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나이만큼 세월이 주는 깨달음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인생의 답을 찾아 헤매는 존재였다.
요즘 이름에 ‘님’자를 붙여 상호 존대하는 문화가 유행이다. 멋지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습관적으로 언니, 오빠라 부를 때가 많다. 어머님, 아버님 같은 가족적 호칭을 쓸 때도 있고, 상대의 직업을 호칭으로 부를 때도 있다. 그게 나쁘다 할 순 없지만 한 번쯤은 상대에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 물어 보는 건 어떨까.
혹시 당신이 연장자라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도 한 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이건 한국사회에서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기울어진 언어에 너무 오래 편안함을 느낀 건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내가 아는 비밀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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