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전달할 수 있는 권한은 사람이 가진 가장 큰 권력 중 하나
말할 기회가 제한된 사람의 언어는 짧고 압축적이고 과격한 ‘구호’ 化
맥락 알아채기 어렵고 허점 많지만 ‘구호’는 약자들의 필사적인 메시지
오늘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 있었다. 예정한 일이 마감에 가까워 갑자기 바뀐 것이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각자에게 다 나름의 사정도 있기 마련이다. 그 사정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오늘은 그 사정이 사실이 아닌 것 같아 불쾌했지만,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고, 이미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을 지면에 내가 불쾌했다는 말을 쓰고 있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이 글을 읽기 전에 내 하루가 즐거웠는지 나빴는지 궁금했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기분을 여기에 썼다. 나에게 이 자리에서 말할 목소리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글은 목소리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권력이다.
우리 사회에 불평등한 자원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남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권력이야말로 으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남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 남이 듣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 이 힘은 대단히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온몸을 불사르거나 수백 일을 전광판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 있어도, 아스팔트 바닥에 오체투지를 해도, 1만 명이 모여 피켓을 흔들어도 세상에 한두 마디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할 기회와 시간이 아주 많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가훈이 정직이고 유리아주 립밤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할 힘이 있었다.
반면, 아무 말이나 할 수 없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할 말을 고르고 또 고르고, 그 말을 다시 줄이고 또 줄여야 한다. 자신의 말이 전달될 기회가 적고, 주어진 시간이 짧고, 듣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소리의 권력이 작은 사람은 말을 자꾸 줄인다. 최대한 압축한 말은 구호가 된다.
구호는 짧고 분명하니 잘 전달될까? 그렇지 않다. 애당초 목소리의 권력이 작아 말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구호는 종종 맥락이 없고 과격해 보인다. “지금까지 수사기관은 불법촬영 사건 피의자들을 불구속 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 피의자는 신속히 구속 기소된 것을 보면 수사기관이 성별에 따라 달리 판단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또한 불법촬영물을 신고해도 가해자가 기소되거나 처벌받는 비율이 낮고,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는 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수사관이 무심하고 소극적인 경우가 많아 사법절차를 불신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여기 각 범죄의 기소율 통계, 양형자료, 경험자들의 진술,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이 말을 다 할 힘이 없으면 “동일범죄 동일처벌”, “불법촬영 엄벌”까지 말하고 밀려난다. 그나마도 구호를 만들 만큼 노련한 경우에나 가능하다. 말을 잘 압축하지 못하면 “집 밖에서 화장실도 못 가고”까지 말하고 사회적 발언권을 잃는다.
그러면 이 짧고 작은 말에 트집을 잡기는 아주 쉽다. 줄인 만큼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양형기준과 불구속 수사 원칙은 아시나요? 수사기관은 원칙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지요. 어느 한쪽 편만 들거나 개인의 지나친 피해의식을 다 받아줄 수는 없어요. 수사관들이 일부러 듣기 싫은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안 되는 걸 다 된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화장실도 수시로 점검하고 있어요. 그건 문고리를 고쳐 단 구멍이고 저건 휴지걸이 달았던 구멍이고요. 어휴, 너무 민감하시네요.”
보통 구호의 반대편에는 이렇게 길고 완전하고 세련된 말이 있다. 더 큰 권력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더 논리적인 말이 아니라 더 큰 권력이다.
큰 목소리와 길고 유려한 글이 “정소연이 오늘 기분이 좀 나빴다더라” 같은 아무래도 좋은 얘기이고, 짧고 과격하고 무리해 보이는 구호가, 힘이 없는 이들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필사적으로 줄여 내보내는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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