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계는 2000년대 들어 메이저리그(미국 프로야구)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헤지펀드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존 헨리가 대표적으로, 2002년 명문 구단 보스턴 레드삭스를 인수했다. 금융과 야구는 방대한 숫자 속에서 가치를 찾아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헨리는 자신의 금융 노하우와 야구의 새로운 데이터 분석을 접목해 성공했다. 2년 뒤 보스턴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즈음 메이저리그는 세이버메트릭스라는 통계 분석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 혁신을 일으킨 빌리 빈(오클랜드 부사장)의 ‘머니볼’ 이론이 대세였다. 헨리뿐만 아니라 금융 등을 전공해 숫자와 데이터에 밝은 아이비리그(미 동부 명문 사립대를 통칭) 출신 수재들이 야구계에 몰려들었다. 지금은 30개 구단 단장 중 절반 정도가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돌아가며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이런 혁신을 국내에 끌고 온 인물이 바로 이장석 전 넥센 히어로즈 대표였다. 기업 인수합병(M&A) 전문가인 그는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해 2008년 히어로즈(영웅)라는 새로운 팀을 출범시켰다. 기업을 사고파는 데서 쌓은 노하우와 야구 통계를 연결시켰다. 돈이 되는 핵심 선수 상당수를 내다 팔고, 값싼 유망주 위주로 팀을 재편했다. 갖은 비난에도 인수 5년 만인 2013년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이듬해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놨다. 팬들은 빌리 빈의 이름을 빗대 ‘빌리 장석’이라고 불렀다.
산업적으로도 성공이었다. 국내 프로야구는 모기업이 지원하지 않을 경우 연간 100억 원 안팎의 적자를 내는 구조이다. 미국식 자력갱생 모델은 불가능하다는 게 상식처럼 여겨졌다. 그는 입장 수입과 광고 후원 계약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가입금도 못 내 쩔쩔맸던 구단이 2016년엔 무려 190억 원가량의 흑자를 냈다. 메이저리그보다 어쩌면 더 개량된 혁신이었다.
‘스티브 잡스’라고 추앙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는 지금 영어의 몸이다. 사기, 횡령, 배임 등으로 올 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수십억 원의 투자금을 받고도 투자자에게 약속한 지분을 넘겨주지 않았고, 야구단 돈 수십억 원을 빼돌려 썼다. 재능은 탐욕의 하인이었다. 최근에는 선수 트레이드 때 다른 구단들로부터 130여억 원의 뒷돈을 받은 사실까지 드러나 리그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엄청난 분노가 일고 있지만, 냉정히 보면 야구계도 뒷돈을 건넨 공범자이다. 개인의 부도덕으로 한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100억 원 넘는 자유계약선수(FA) 몸값이 발표액과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는 현실. 외국인 선수 영입 때도 발표액보다 더 많은 돈을 줬을 거라는 소문의 연속. ‘구단들은 윤리적이지 않고, 성적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판단을 한 이장석은 뒷돈을 요구했고, 대부분 받아냈다.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하려면, 그의 공과를 정확히 평가해 시사점을 찾아야 한다. 성적과 수익 양면에서 혁신이 가능하다는 점, 이런 혁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보다 투명하게 만들고, 윤리의 틀을 지켜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공교롭게도 한국야구위원회(KBO) 정운찬 신임 총재가 내세운 ‘산업화’와 ‘클린 베이스볼’의 공약과 일치한다. 다소 모호한 정 총재의 선언이 이 전 대표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느낌이다. KBO가 이 전 대표의 악재를 처리하는 과정이 바로 정 총재의 공약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KBO의 한마디 한마디에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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