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철은 지금 본인의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정치군인에 불과한 그에게 북-미 외교와 남북 관계 총책이라는 지금 자리는 분에 넘칩니다. 물론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지만, 나중에 숙청될 운명이 될 수도 있어요.” 역시 외교관 출신 엘리트답게 최근 북-미 대화의 판을 보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56)의 눈은 예리했다. 지난달 27일 기자와 두 번째 만난 그는 북한 비핵화 북-미 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평양 관료정치 갈등’을 한동안 역설했다. 》
“대화가 잘될 때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삐걱거리면 곧바로 당 조직지도부가 검열에 들어갑니다. 핵문제의 기술적인 부분을 잘 모르는 김정은과 김영철이 잘못 내린 결정이 많을 텐데, 김정은 지시에 따른 것이라도 책임은 김영철이 지게 됩니다.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김정은은 뒷짐 지고 모른 체하겠죠.”
이런 합리적인 추정의 역사적 근거들은 지난달 출간한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넘쳐난다. 실제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최승철(통일전선부 부부장)과 뒷선에서 지휘했던 한시해(전 유엔 주재 대사)와 권희경(전 주러시아 대사),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 관계에 발을 들였던 류경(국가보위부 부부장)도 총살을 당했다.
그는 “지금 현 상황을 외무상이자 대미협상 베테랑인 이용호가 끌고 나간다면 상당히 오래가겠지만 김영철이 운전하고 있어 언제 갑자기 멈추어설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현장에 국제 전문가들을 초대하겠다고 남측에 밝혔다가 뒤늦게 철회한 것이 대표적인 ‘삑사리’ 사례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김영철이 뉴욕을 통해 워싱턴에 입성하기 전날인 1일. 기자와 다시 만난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을 만나더라도 그의 비핵화 진정성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천천히 가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잘 확인하고 가야 후회하지 않는다. 주변 보좌관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만남 사이에 북-미 관계만큼이나 큰 변화가 그에게 있었다. 그의 증언록을 읽고 전화를 걸어온 5촌 아저씨 A 씨를 지난달 29일 만난 것이다. 기적처럼 남한에서 혈육을 찾고, 그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까지 얻은 그는 그날 밤늦도록 “너무 행복하다”는 문자메시지를 기자에게 연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30일자 동아일보에 단독 보도된 것을 보고 많은 지인이 축하 전화를 해왔어요. 그중에 목사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제일 어려울 때 신의 가호가 함께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했거든요. 따라서 앞으로 당신과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신이 함께하시니까요’라고요.”
A 씨도 흡족해하며 전화를 걸어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내려온 80대 친구들이 향우회를 하고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지난해 11월 첫 인터뷰를 한 뒤 세 번의 만남 동안 태 전 공사 가족의 교육열을 실감했다. 증언록 곳곳에는 외국에 부임할 때 규정을 피해 자식을 함께 데리고 가서 교육하려는 아버지 태영호의 눈물겨운 노력이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국가의 특혜를 많이 받으며 잘나갔다”는 그가 2016년 8월 탈북한 것도 두 아들을 자유로운 환경에서 더 잘 가르치겠다는 일념에서다.
한국에 와 국정원 안가에서 지내는 6개월 동안 태 전 공사는 두 아들과 동아일보 등 한국 대표 신문의 사설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매일 두 시간씩 가졌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 신문 사설만 한 교재가 없다’며 게으름을 경계한 결과 아들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와 현안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교육열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힘 있는 집 아이들은 다 영어학부를 신청한다. 앞으로는 영어가 대세라는 뜻이다”라며 “러시아어를 배워야 소련에라도 가지, 미국 놈 말은 배워 뭘 하느냐”던 아버지를 설득해 아들을 평양외국어학원 영어학부에 보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한국에 와 이제 민간인의 몸이 된 자신에게 뭘 하라고 다그쳤을지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잘 먹고 잘살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 노예 상태인 북한 주민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자유와 풍요로움을 선사하기 위해 투쟁하러 온 것이다’라는 결심으로 공무원 신분이나 다름없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직을 과감하게 벗어 던진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다.
우선 이해될 듯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요즘도 주요 신문 사설을 모아 소개하는 휴대전화 앱을 빼놓지 않고 본다는 그는 “신문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다양한 토론 문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채널A의 ‘돌직구쇼’를 즐겨 보며 한국 사회 내의 다양한 쟁점과 입장에 대해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관찰 결과를 내놓았다.
“진보는 선전에 능하고 개인과 조직들이 매우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봅니다. 4·27 정상회담만 보더라도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는 구호를 들고 생중계를 통해 김정은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지 않았습니까? 독재자 김정은이 하루아침에 근사한 젊은 지도자로 탈바꿈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는 “진보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바탕인 시민단체 네트워크들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며 “반면 보수는 목소리들이 잘 모아지지 않는다. 몇몇 정치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조직들이 지도자를 잃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풍요한 보수 진영 인사들은 사회적인 논쟁에 굳이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반면 진보 진영은 이른바 ‘헝그리 정신’으로 뭉치는 것 같아요. 창출된 소득을 이제는 시민사회에 평등하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지금 정부의 생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그리스처럼 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증언록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2016년 5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2017년까지를 핵무력 완성 시기로, 2018년부터는 ‘핵보유를 위한 평화환경의 조성 시기’로 정했다.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델을 따르기로 했다. 단기간에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마무리 짓고 동결 선언을 한 다음 평화 공세를 벌여 자연스럽게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해석되는 북한의 생각과 모습은 진짜 북한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일부 전문가가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다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몇 개 숨겨놓은 핵무기는 정치적 레버리지가 되지 못해 한국이나 일본에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자위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비핵화로 포장된 핵보유국이 되려는 김정은의 전략에 말려드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는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의 북한 실상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그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구상해 놨다. 그를 따르고 지원하는 지인들이 옆에서 힘이 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모임도 그의 새 출발을 응원하기 위해 지인들이 만든 자리였다. 그도 나도 무신론자이지만 그에게 외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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