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아래서]<4>와인 한 잔은 나무, 바람, 햇빛을 느끼는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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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술을 만들려고 하면서 농사는 왜 지으려는 거지? 과일은 구입하면 훨씬 경제적이야.”

어렵게 작업장을 구하고 났더니 레돔은 이제 과일밭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농사짓기는 좀 늦추자는 나의 권유에 그는 어깨만 으쓱했다. 싫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농사에 대한 계획이 다 서 있었다. 좋은 술은 농부의 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 술 한 잔은 그냥 술 한 잔이 아니야.”

그때 우리는 레돔이 일했던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와이너리에서 가져온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형제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와인을 만드는 작은 와이너리의 술이었다. 겨울 한 달 동안 가지치기를 했고 봄이 오면 풀을 베고 여름이면 포도를 수확해서 착즙을 했다. 즙은 겨울 내내 천천히 발효돼 갔고 그동안 포도밭은 누렇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고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밭에서부터 술이 될 때까지 모두 농부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사이클로 돌아갔다. 농부는 자신의 땅과 포도나무는 물론이고 그곳에 불어닥치는 비와 바람, 태양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어떤 맛의 와인으로 탄생될지 농사를 지으면서 벌써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한 잔은 농부의 자식과 같다고 할 수 있어.”

레돔은 한국에서도 알자스 농부의 방식대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곳 양조장들은 대부분 농부가 직접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든다. 대량 생산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와인은 그곳 농부의 와인 창고에 가야만 구할 수 있다. 파리의 슈퍼마켓에 파는 알자스 와인은 대부분 대형 양조장에서 매입한 포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좋은 술들은 그 지역에서 다 소비돼 버린다.

“좋은 와인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질문은 어떤 여자가 젤 예쁜 여자냐는 질문과 같아. 맛있는 와인이란 없어. 한 잔의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그 과일이 자란 땅과 나무, 바람과 햇빛을 느끼고 즐긴다는 것이야. 좀 거칠거나 심플해서 별 맛이 없다 해도 그것은 그 술이 온 땅에 대한 솔직한 설명이야.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향이나 맛을 첨가하지 않은 술이라면 그 자체로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해.”

편하게 가기 위해 늘 짱구를 굴리지만 나는 또 설득돼서 과일밭을 찾기 시작했다.

“사과밭이든 포도밭이든, 우리는 둘 다 좋아요. 집 근처면 좋지만 좀 멀어도 괜찮아요.”

어느 날 보일러 수리하러 오신 동네 할아버지께 이렇게 부탁했다. 뒷마감이 서툰 할아버지는 난로가에 앉아 충북 충주시 엄정면 일대 보일러와 수도는 자기가 다 고친다는 것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겨 하셨다.

“농사는 뭐 할라고 지을라캐? 밭에 함 나가봐라. 얼굴 시커멓게 되고 허리 꼬부라들고 폭싹 늙는다. 시작하면 그만둘 수도 없어. 죽도록 고생만 한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충고하며 술 한 잔 드신 뒤 가버렸다. 하긴 나에게도 파리의 미술관들을 순례하고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지나가는 개들을 구경하던 파리지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농군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밭으로 가야 한다. 어떻게 하나 내 인생, 야단났다.

그냥 과일 사서 술 만들자, 이렇게 레돔을 회유해볼까 하는데 보일러 할아버지가 사과밭을 구했다고 연락이 왔다. 당장 하겠다고 했더니 밭주인이 다음 날 임대료를 배로 올려 버렸다. 너무 화가 나서 펄펄 뛰는 사이에 할아버지가 또 다른 밭을 구해주셨다. 임대료도 없었다. 우리는 신이 났다. 그러나 공짜 밭 2000평이 우리에게 떨어졌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농사#포도#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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