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발연구원(KDI)이 4일, 앞으로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하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자 큰 반향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제 연구기관이 대통령과 청와대의 주장에 반하는 연구 결과를 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KDI가 이보다 나흘 앞선 지난달 31일 발표한 ‘상반기 경제전망 보고서’에 더 관심이 갔다.
‘수요 확대와 더불어 공급 측면의 규제개혁이 지속 성장의 주요 요인인 만큼 정책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김현욱 KDI 거시경제연구부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공급 쪽을 개혁하는 혁신성장이 수요를 늘리는 소득주도성장에 비해 추진 속도가 느리다”고 말했다. 국가에서 녹을 받는 국책연구기관이어서 최대한 에둘러 표현했지만 나에게는 “문재인 대통령은 소득주도성장에만 매달리지 말고 기업들이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우리 정부 1년이 지나도록 혁신성장에서 뚜렷한 성과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며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질타했다. 대통령이 호통을 칠 정도로 혁신성장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 사령탑인 김 부총리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오롯이 김 부총리에게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혁신성장은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눈치가 100단’인 공무원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대통령이 분명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 공무원들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 내린 ‘지금 정권에서는 친노동-반기업 기조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다.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은 얼마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혁신성장이 안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관료의 ‘예측복종’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공무원들은 말을 직접 하지 않아도 눈치를 보고 느낌을 파악해 사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4월에 추가경정예산을 발표하면서 배터리 전기차 보조금을 편성하면서도 수소전기차는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뺀 것이 이런 ‘예측복종’의 대표 사례다. ‘수소차 모델을 판매하고 있는 특정 업체(현대차)에 특혜가 된다’는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기업이 팔지 않는 제품도 있다던가.
둘째, 대통령이 직접 혁신성장을 챙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부 부처들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본능적으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장관들이 시간만 나면 청와대로 달려가면서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회의에는 차관을 대참시키려는 이유가 있다. 부처가 발표하는 보도자료의 토씨까지 간섭하는 청와대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혁신성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신호를 줘야 다른 부처들도 움직인다. 8일 김동연 부총리 주재로 열린 1차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에 보건복지부 장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참석한 것도 대통령의 ‘호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혁신성장의 핵심은 규제 완화다. 규제를 풀려면 법을 바꾸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해당사자도 설득해야 한다. 대통령이 정치력을 발휘해야 가능한 일이다.
김동연 부총리는 8일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에서 “패키지 규제 완화를 통해 대기업을 포함해 고용 창출에 기반을 두는 기업들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1년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반복해온 얘기다. 하지만 그동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과연 이번엔 다를까. 그 열쇠는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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