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와 북-미 정상회담 등 정치외교 이슈 탓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산업현장에서는 좀비기업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좀비기업은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갚지 못해 외부적 지원이 없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기업을 말한다. 점잖은 표현으로는 한계기업이라고도 한다.
올 3월 한국은행은 외부감사 기업의 일곱 중 하나가 좀비기업이고, 게다가 점차 만성화되고 있다는 어두운 동향 보고서를 냈다. 국회에서 나온 한 자료에 따르면 좀비기업에 속한 근로자가 34만 명에, 이들이 받는 인건비만 23조 원에 이른다. 분명 국가 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이고 경기가 나아질 조짐이 없으니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다.
좀비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덤핑 등 비상한 수단을 쓰기도 하는데 그러면 같은 업종의 정상적인 기업들까지 동반 부실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게다가 좀비기업들이 인력과 자본을 틀어쥐고 있는 탓에 정작 창업기업 수가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래서 좀비기업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만 없다면 빨리 정리돼야 할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기술혁신의 관점에서 좀비기업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도 있다. 성공한 기업들 가운데 한때 좀비가 아니었던 기업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인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혁신기업 테슬라는 2008년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적자만 보고 있고, 2016년 한 해만 해도 6억7000만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했지만 누구도 좀비라고 비웃지 않는다. 카카오톡도 2006년 창업했지만 2012년 12월에 처음으로 흑자 전환했으니 어쨌든 좀비였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를 보면 좀비기업이라는 것은 성공을 위해 거쳐야 하는 필연적인 시행착오 축적의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혁신을 진작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좀비를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보증지원 정책 등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 상당 부분이 암묵적으로 이런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좀비기업이 시행착오를 쌓고 있는 누에고치이기 때문에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성공적 혁신을 위해서 시행착오를 축적하는 것이 꼭 필요하지만 그 축적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반드시 산업생태계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좀비기업의 실패 경험은 다른 기업으로 곧바로 전파돼 새로운 맥락에서 재해석되고, 재활용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성공적이지 못한 비즈니스 모델은 좀비기업 내에서 막연히 퇴적되면서 썩어갈 뿐이다.
실리콘밸리의 진면목은 좀비기업들이 어떻게든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소멸하되, 그 경험이 적재적소로 전달돼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데 있다. 테슬라와 카카오톡처럼 한 기업이 버티다가 성공한 이야기도 있지만 선발 좀비기업이 빠르게 실패하고, 그 경험을 이어받아 후발 기업이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해서 마침내 성공한 사례가 더 보편적이다.
우리나라의 산업 환경에서 좀비 문제를 풀기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퇴출의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부실한 상태로라도 연명하려고 한다. 직원들도 축적된 전문성이 없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힘들고, 따라서 실업이 주는 공포감 때문에 빠른 구조조정에 결사반대한다. 이렇게 퇴출 비용이 높아서는 경험을 재활용할 방법이 없다.
좀비기업 구조조정 문제는 폭탄 돌리기 하듯 미룰 일이 아니다. 반드시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구조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좀비기업의 실패 경험이 산업생태계 관점에서 중요한 축적의 재료라는 점이 대전제가 돼야 한다. 그러자면 좀비기업이 가진 축적된 경험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식별하고 더 생산적인 곳에서 새로운 조합의 재료가 되도록 연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권 금융부터 혁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자본시장이 더 큰 역할을 하게 하고, 산업과 기술 전문가가 구조조정 과정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정부 정책도 창업이나 성장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쪽으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좀비기업은 그저 없애야 할 병적 존재가 아니다.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라는 식지 않는 혁신의 엔진을 돌리는 가장 귀중한 연료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