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반도와 관련해 지구촌에서 중요한 회의가 두 개 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 아시다시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얼까요.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 교류 세미나입니다.”
12일 오후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의 시베이(西北)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시베이대 실크로드연구원 리강(李剛) 교수는 이날 세미나가 한중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시베이대와 주시안 한국총영사관 주최로 양국 전문가 2명씩 4명이 주제 발표를 한 소규모 세미나를 북-미 정상회담과 나란히 비교한 것은 분명 과장된 표현이다.
하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한 말이기도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 나선 뒤 북-중, 북-미, 남북 관계가 요동치는 가운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앙금’으로 소원해진 한중 관계를 개선하려는 중국 내부의 분위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통해 정상 국가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김 위원장이나 북한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리 교수의 발언은 한국에 대한 중국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강국 주시안 총영사는 “사드 갈등이 한창일 때 중국 측이 한중 일반 학술대회도 갑자기 취소하던 때와는 천지 차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이날 세미나는 시안에서 한국과 중국이 어떻게 손잡고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는지가 주제였지만 광복군과 공산당의 협력 관계를 강조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중국 내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창사(長沙) 항저우(杭州) 충칭(重慶) 등으로 옮겨 다닐 때 주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 도움을 받았으나 마오쩌둥(毛澤東) 휘하의 공산당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이건싱(拜根興) 산시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는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될 때 공산당 지도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창당 멤버인 둥비우(董必武) 등도 참가해 서명했다”며 “시안 인근 공산당 성지 옌안(延安)과 독립군 성지 시안은 산시성의 한 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바이 교수는 “2014년 6월 ‘화상(華商)보’에는 항전 시기 시안이 광복 활동에 참여하려는 한국 청년들의 성지였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고 말했다.
단국대 사학과 한시준 교수(동양학연구원장)는 “시안에는 임시정부가 군사특사단을 파견해 한인 청년 등을 모집했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라는 군사조직이 시안에서 활동했다”고 발표했다. 한 교수는 “행사가 열린 시베이대에 한국청년(군사)훈련반이 설치돼 3기까지 배출됐고 무엇보다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이 초기 2년간 시안으로 옮겨와 있었다”고 소개했다. 미군 특수부대인 OSS와 광복군이 함께 한반도 침공 계획인 ‘독수리 작전’을 준비한 훈련 장소가 올해 처음 확인되기도 했다(본보 2월 28일 단독 보도). 서울시립대 사학과 염인호 교수는 ‘조선의용군의 항일 투쟁과 한중 연대’에 대해 발표했다.
시베이대 리웨이(李偉) 교수는 “김구 주석이 이끄는 임정 등 독립운동 지원은 주로 국민당이 한 것은 맞지만 항일 투쟁이란 목표에서는 공산당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중국 공산당은 ‘6·25전쟁에 참전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아무리 한일 관계가 좋아져도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주범’이란 역사적 각인을 지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싱가포르 회담으로 6·25 때 전쟁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양국 정상이 전쟁 후 처음 만나 지구촌에 남아있는 마지막 냉전 구조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 이런 즈음에 중국이 6·25전쟁 전에는 공산당이 한민족과 ‘공동 항일의 역사’가 있다며 우의를 강조하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반도 비핵화 무드’가 주는 또 다른 긍정적 효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지방에서 열린 세미나 규모는 작아도 의미는 작지 않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했다. ―시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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