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가 쓴 논어(論語)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된다. 어떤 책이든 첫 구절은 상당히 중요하다. 글 쓰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역시 글 전체를 아우르거나 상징하는 첫 구절을 어떻게 시작하느냐다.
그런데 공자는 왜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어쩌면 다소 평범한 문구로 논어를 시작했을까.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이에 대한 의문은 꼬리를 물고 큰 논쟁으로 이어졌다. 첫 단어인 학(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성리학과 양명학이 갈라졌고, 조선시대의 잇단 사화도 결국 논어의 해석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자가 ‘배우고 익히는 것(學習)’을 중시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학습의 구체적인 목표는 일(직업)을 잘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이 인간이 기뻐해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이고, 그러기 위해 배우고 익히라는 주문이다.
일을 중시하는 생각의 뿌리는 동양사상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주역(周易)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역에는 성인(聖人)과 군자(君子)의 본분을 각각 ‘숭덕광업(崇德廣業)’과 ‘진덕수업(進德修業)’으로 적고 있다. 여러 풀이가 있지만 성인, 즉 국가 최고 지도자의 핵심 업무는 일자리를 늘리는 것(廣業)이고, 지식인이나 관리 등 실무자들은 일을 잘하기 위한 능력을 닦는 것(修業)이 중요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조선시대 선비는 약관(弱冠) 20세까지는 공부에 전념했지만 20세가 넘어 성인이 되면 일을 해야 했다. 관리가 아닌 선비는 낮에 농사짓고 밤에 틈을 내 공부하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한마디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렇지 않은 선비들도 있었나 보다. 남들이 땀 흘려 일하는 대낮에 책만 읽거나 노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지칭했던 말이 바로 ‘땀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불한당(不汗黨)이다. 사회에 폐를 끼치는 파렴치한 강도떼를 말하는 불한당의 원조는 결국 ‘일하지 않는 사람들’인 셈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직업이다. 옛날에는 직업을 국가나 신이 부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근대가 싹틀 때까지도 그랬다.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지표’에서 ‘국가가 나눠주는 것을 직(職), 백성들이 받은 것을 업(業)’이라고 했다. 백성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직업이란 뜻이다. 서양도 비슷하다. 장 칼뱅에서 막스 베버로 이어진 프로테스탄트 윤리개념인 ‘(신이 정해준) 소명으로서의 직업’은 가장 유명한 표현이다. 주어진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의 뜻이자 구원으로 가는 길이란 설명이다.
지금은 직업을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다. 직업의 개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직업학에선 ‘경제성, 자아실현, 사회발전에 대한 기여’를 세 가지 핵심 요소로 본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업 활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좋은 직업이라는 얘기다. 이 세 요소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올바른 직업 선택의 첫걸음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