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사람의 기억이란 묘한 데가 있다. 나는 매일같이 오늘만 사는데 기억은 과거를 살게 해준다. 눈은 바로 앞의 풍경밖에 보질 못하는데, 기억은 20년 전의 풍경을 보게 해준다. 비유하자면 기억은 마치 마음속에 꼭꼭 숨겨 놓은 문과 같다. 우리는 매번 그 문으로 드나들지는 않는다. 그 대신 기억의 문은 제멋대로, 불쑥불쑥 열리곤 한다.
기억이 일종의 문이라면, 김상옥의 시는 그 문에 노크를 하는 시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는 세 종류의 기억이 얽혀 있다. 우선, 시인이 시 안에서 누님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으로, 시인의 상상 속에서 누님은 떠나온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은 시인도 누님도 아닌, 우리의 기억이다. 이 시를 읽는 각각의 독자는 저마다의 마음에 잠들어 있던 유년과 고향과 꽃물을 만나게 된다.
세 가지 기억의 공통분모인 봉선화는 대표적인 여름 꽃이다. 4월쯤 씨를 뿌리면 6월 말, 바로 이맘때부터 꽃이 핀다. 봉선화를 보면 떨리는 마음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던 그때가 떠오른다. 우리는 어렸고, 순수했고, 멋진 다음 날 아침을 기대했다.
이런 기억은 지식의 저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지식의 용량이 아무리 커져도 우리의 기억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한 사람이 태어나면 기억도 태어나고, 한 사람이 죽으면 기억도 함께 죽는다. 정말이지 사람의 기억이란, 묘한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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