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이집트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을 보니 더 간절한 것 같다. 스웨덴에 이어 멕시코에도 패배를 당했지만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다.
27일 조별리그 3차전에서 멕시코가 스웨덴을 꺾고, 한국이 독일을 이기면 한국이 16강에 오를 가능성이 없진 않다. 상대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독일이지만 절대 기죽지 말라고 목청껏 응원할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과 똑같이 2패를 당한 이집트(A조)는 희망이 없다. 같은 조 러시아와 우루과이가 나란히 2승을 거둬 16강 진출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집트는 ‘다크호스’로 꼽히며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이번 월드컵에서 해설가로 데뷔한 박지성 대한축구협회 유스전략본부장은 지난달 “‘무함마드 살라흐’라는 올 시즌 선풍적인 활약을 보여준 선수와 함께 이집트가 어떤 성과를 낼지 기대된다”며 “조 1위를 한다면 8강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리버풀 소속인 살라흐는 올해 리그 득점왕(32득점)에 오르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조 편성도 행운이 따른 듯했다. 이집트(FIFA 랭킹 45위)는 월드컵 본선 32개국 가운데 최하위권인 러시아(70위) 사우디아라비아(67위)와 같은 조에 편성됐다. 스포츠 통계업체 OPTA는 월드컵 개막 전 이집트의 조별리그 통과 가능성(50.7%)을 우루과이(59.1%) 다음으로 높게 봤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28년 만에 본선 무대에 오른 이집트는 그야말로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다른 아랍 국가들도 월드컵 개막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 월드컵에는 이집트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 모로코 등 아랍 4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이란까지 포함하면 중동에서만 5개국이 참가해 열사의 땅에서 월드컵 열기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중동 지역 채용 포털사이트 걸프탤런트(GulfTalent)가 최근 중동의 직장인 8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2%가 근무시간 중에 월드컵 경기를 시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 보니 낮 시간 금식으로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라마단(이슬람 성월·올해 5월 17일∼6월 14일)에 이어 다음 달 15일까지 이어지는 월드컵 열기가 중동 지역의 노동생산성을 크게 낮출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대부분의 경기가 아랍에미리트(UAE) 시간을 기준으로 근무시간대인 오후 2시에서 오전 1시 사이에 열린다”며 “직장인 대부분이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경기를 시청할 계획”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 지역의 노동생산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이란을 제외한 이집트, 사우디, 튀니지, 모로코가 일찌감치 16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월드컵 열기가 한풀 꺾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집트는 국민들의 깊은 좌절감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정부의 고강도 긴축 정책으로 고통 받던 이집트 국민들에게 축구는 비참한 현실을 잊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믿었던 축구마저 기대를 저버리면서 분노의 화살은 정부로 향하고 있다.
이집트 국민들은 월드컵 16강 탈락이 확정된 뒤 “자유도 없고, 정의도 없고, 교육도 없고, 국가도 없고, 휴머니티도 없다. 떠날 때가 됐다”며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 트윗을 27만9000회 이상 리트윗(퍼나르기)했다.
기자는 이집트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펴길 바랐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이 2002 한일 월드컵 4강을 계기로 자존감을 회복했던 것처럼…. 비록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마지막 경기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경제난에 지친 이집트 국민들에게도 결코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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