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이 다음 달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스튜어드)처럼 기관투자가가 개별 투자자를 대신해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행동지침이다.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주주가치 제고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도입의 근거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범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 중이지만 경영진 면담, 사외이사 추천, 주주대표 소송 등의 방법을 활용할 것이라고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제왕적 오너 경영자’가 많은 한국적 상황에서 ‘오너 리스크’가 기업의 주가를 실제 가치보다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기관투자가의 간섭이 경영 자율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긍정적 측면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국민연금의 규모를 생각하면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연금은 630조 원을 굴리면서 국내 증시에만 130조 원을 투자하고 있는 ‘공룡 투자자’다.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 보유한 상장사만 300개 가깝다. 정부가 이런 국민연금을 자칫 기업 길들이기나 지배구조 재편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면, 종내는 연금을 통해 기업을 움직이는 ‘연금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 때문에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소조차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전제조건으로 국민연금의 독립성, 전문성 강화를 꼽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국민연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전문성은 차치하고라도 개별 투자결정은 기금운용본부에 맡긴다는 원칙을 지켰는지부터 의문이다. 그나마 기금운용본부장 임명도 차일피일 미뤄져 11개월째 공석이다. 박능후 장관이 대한항공에 대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제안해 경영권 개입 논란을 일으킨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다. KB국민은행 노동이사 선임에 찬성표를 던진 것처럼 국민연금이 정부 입맛에 맞게 기업생태계와 노사관계를 바꾸는 만능열쇠로 쓰일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영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캐나다 등 20여 개국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있다며 제도 시행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독립적 기금 운용 제도는 간과하고 있다. 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임명하는 제도 아래서 국민연금이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금 운용을 외부에 위탁하거나 운용을 위한 별도 법인을 설립하는 등 철저히 자율성과 독립성, 전문성을 보장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생각한다면 기업이 아니라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부터 손봐야 한다.
댓글 0